박지현씨(26)에겐 42일이 있었다. 무언가 망치기엔 충분하지만, 이뤄내기엔 길지 않은 시간. 대학생 기자로 일하며 2019년 디지털성범죄집단 N번방의 실체를 추적해 알린 그는 지난 1월말 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했다. 선거까지 42일동안 민주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디지털성범죄근절특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N번방을 고발할 때 안전을 위해 ‘불’이라는 아이디로만 활동하던 그는 선거 때문에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 정치인이 됐다. 선거는 끝났고 민주당은 졌다. 그에게 42일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이제 그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박씨는 “민주당은 졌지만 2030 여성들은 이겼다”며 “우리는 앞으로 더 결집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와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를 계속 하겠다”고도 말했다. 지난 9일과 10일 박지현씨를 전화로 만났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또렷했다.
박지현씨가 2022년 1월 27일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한 뒤 국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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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이 끝났습니다. 마음은 좀 어떤가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는데 집에 오니까 마음이 그렇지 않더라구요.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낸 공약들이 여성을 배제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이제 그런 것들을 지키지 않도록 하는 게 남은 과제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뭔가 더 강해져야겠다 하는 마음에 눈물도 안나오는 것 같아요.”
- 개표 후 SNS에 “죄송합니다. 조금 더 열심히 싸웠어야 했는데 부족했습니다”라고 올렸죠.
“네. 열심히 했지만 결과로는 졌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껴서요. SNS로 (많은 분들이) 수천통에 가깝게 ‘좌절하지 마라. 힘내라’ 이런 식의 메시지를 주셨어요.”
- 윤 당선인이 이기긴 했지만 마지막에 2030 여성들의 표가 이 후보 쪽으로 집결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트위터에서 봤는데 ‘윤석열이 이겼지만 이준석과 박지현을 봤을 때 이준석이 지고 박지현이 이긴 거다’라고 써주신 분이 있더라고요. 감사했어요. 2030 여성 표심으로 그들을 심판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기 때문에 굉장히 유의미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2030 여성들이 더욱 결집할 것 같아요.”
- 지긴 했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서 (2030 여성들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보는 거군요.
“네. 앞으로 대통령이 잘못된 행보를 보일 때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다거나, 앞으로 있을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이 느끼셨을 거라고 봐요.”
- 반대로 보면 20대 남성 표가 윤 당선인에게 많이 간 것으로 보입니다.
“20대 남성 일부라고 하기엔 좀 많은 수이긴 하죠. 그런데 저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젠더갈등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20대 남성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여성가족부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고, 여성들이 만든 문제가 아닌데 그런 것들을 정치적으로 전략적으로 활용을 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편가르게 하고 적대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런 과정에서 여성들의 표심이 올라왔구요. 그것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대표가) 2030 투표율에서 국민의힘이 더 높을 거라고 했지만 여성 표심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고, 초박빙의 선거결과가 나왔잖아요. 본인도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박지현씨가 민주당 선대위 디지털성범죄근절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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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선거는 ‘박지현 VS 이준석’이라는 분석도 많았습니다.
“그분과 같은 선상에 놓인다는게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청년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신 것 같아요. ‘저사람은 진짜 내가 이긴다!’ 그런 생각은 했습니다.”
- 선거운동기간에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준석 대표는 정치를 그만해야 한다고 얘기한 적 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한가요.
“네. 여성을 배제하는 나쁜 전략은 틀렸다는 것이 확인됐잖아요. 국민의힘에서도 이준석 대표는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선거 전날까지 젠더 이슈가 쟁점이 됐습니다. 20대 여성으로서 또 정치인으로서 어떻게 봤습니까.
“국민의힘은 여성을 혐오하는 전략을 끝까지 가져갔어요. 윤 당선인이 여성의날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 무고죄 처벌 강화’ 등을 썼다가 내렸죠. 또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했다가 번복했고요. 한 나라의 대선 후보라는 사람이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고 페미니스트라고 했다가 정정하는 것을 보고 좀 창피했습니다. 일부 남성의 표를 잃을까봐 불안감에서 그런 모습이 굉장히 안타까웠고요.”
- 윤 당선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음…이제 당의 후보가 아니고 대통령이니까 나쁜 전략들은 버리고 통합과 화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보여준 모습이 너무 권위적이었 때문에 검찰총장으로서 가져왔던 그런 모습을 버리고, 정말 나라의 일꾼으로서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이 됐다고 너무 들뜨지 말고,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지금은 부족한 상황이니까 성평등 인식부터 공부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중에 이재명 후보가 박지현씨에게 전화를 했다. 선대위 해단식이 끝난 후였다. 이 후보는 “정말 고생했고 고마웠고 미안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선대위 합류 후 선거일까지 42일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제가 주로 대학들을 다니면서 청년유권자들을 만났는데, 갈 때마다 많은 2030 여성들이 3~4장씩 손편지를 써서 주셨어요. 저한테 ‘미안하다. 빚을 졌다’고 하셨는데 고맙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이 사회와 가해자들이 잘못한 것인데 왜 그분들이 나에게 미안해할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박지현씨가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인 2022년 3월 8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 걷고싶은 거리 광장 무대에 올라 이재명 후보의 마지막 유세를 지원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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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을 엿새 앞두고 2030 여성 7431명이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을 했죠.
“네. 윤석열 (정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2030 여성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여성위원회에 이런 걸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청년선대위와 함께 했는데 사실 크게 기대는 안했어요. 100인 선언 정도로 할까도 생각했는데 3~4일만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주셨어요.”
- 선거운동 기간에 ‘생존을 위한 투표’를 얘기했습니다. 많은 2030 여성들도 “살려고 투표한다”고 했어요. 2030 여성들이 왜 그렇게까지 간절했다고 생각하나요.
“윤석열 당선인이 여성을 배제하는 정치전략을 썼잖아요. 분명히 참정권이 있는 유권자인데 (여성들을) 너무나 배제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눈에 띄게 보여줬죠. 2030 여성들 지지선언 당일에 제가 메시지를 대독했는데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 이분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느껴졌어요. 당장 여가부가 폐지되면 (많은) 피해자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불안이 저에게도 전달이 됐어요.”
박지현씨(첫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2022년 3월 3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터에서 열린 2030 여성들의 지지선언 행사에 참석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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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6개월동안 추적단불꽃에서 다른 활동가 ‘단’과 함께 N번방의 실체를 파헤친 박지현씨는 신변의 안전을 우려해 선대위 합류 후에도 마스크는 벗지 않았다. 일부에서 박씨의 얼굴로 나쁜 딥페이크를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박씨는 지난 2일 변영주 영화감독이 “박지현씨 때문에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다”며 지원영상을 촬영하자, 현장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내가 언제까지 마스크 뒤에 숨어 있어야 할까 생각했다”며 “다른 사람의 용기가 저에게도 용기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청년들이 정치권에 들어갔을 때 좋은 이미지만 차용당하고 좋지 않은 마지막을 맞는 경우도 많습니다. 박지현씨가 경험한 민주당과 정치는 어땠나요. 민주당 역시 여러 사건에서 여성 유권자들을 실망시키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요.
“우선 청년이 정당에 들어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런데 이 당은 그걸(청년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당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처음 제가 합류했을 때보다 스피커로서 저의 목소리도 커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민주당 의원들 중에 과거에 발언을 함부로 하거나 그런 분들이 있었지만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은 차이로 지긴 했지만, 어쨌든 졌다는 점에서 민주당이 처절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혁신과 변화를 가지고 나가야 할 그런 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2030 여성들의 목소리가 분명히 전달됐다고 생각해요.”
- 민주당의 미래보다는 박지현의 미래를 더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정치를 할 건가요.
“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해보려고 합니다. 제 얼굴과 신변을 드러낸 이상 정치를 하는 것이 저에게도 더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다른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정치권 안에 2030 여성들이 거의 없다 싶은 수준이기 때문에 이렇게 목소리를 낼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시민분들이 응원해주신다면 계속해서 정치를 해보지 않을까 싶어요.”
- 2030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다들 많이 걱정도 되고 힘드실 것 같아요. 낙담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런데 대선에서는 졌지만 2030 여성들의 승리를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선거였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좀 더 자부심을 갖고 결집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서로에게 그만 미안해하고 그냥 한 팀으로서 우리로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위해서 함께 싸워 나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N번방을 파헤친 ‘추적단 불꽃’에서 ‘불’이라는 아이디(ID)를 썼죠. 지금 아이디를 새로 만든다면 뭐라고 지을 것 같아요.
“저는 ‘불’로 2년반을 지내면서 내가 왜 내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까 생각했어요.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하는 마음이 어렴풋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어떤 아이디보다는 그냥 박지현, 제 이름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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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교 소통·젠더데스크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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