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권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최악의 난민 위기를 만들어냈다. 9일(현지시간)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지 2주 동안 우크라이나를 떠난 난민은 215만5271명에 달한다. 이중 절반에 해당하는 100만여명이 어린이로 추정된다.
전쟁을 피해 탈출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지면서 유럽연합(EU)의 난민 수용 정책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EU는 유럽에 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발빠르게 내놓았다. 2015년 시리아 내전에 따른 중동 지역 난민들에 문을 걸어잠근 나라들도 이번에는 국경을 활짝 열었다. 영미권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난민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앞으로 EU 역내에 온 우크라이나 국적자 및 우크라이나 합법 거주 제3국 난민들은 최대 3년간 별도의 난민신청 절차 없이 체류 허가를 받는다. 교육, 주거, 의료, 취업, 사회복지 등 기본권도 보장된다. EU 내에서도 90일간 비자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지난 4일 EU 내무장관들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에 대한 임시보호지침을 적용하기로 합의한 결과다.
EU 차원의 이같은 신속한 조치는 시리아 내전으로 유럽행 난민이 급증한 2015~2016년 당시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우크라이나에 체류해온 중동·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이 피란 과정에서 차별받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이중잣대’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이주민 인권 문제를 연구하는 비영리 단체 글로벌구금프로젝트는 우크라이나 난민 위기를 계기로 유럽이 인종차별적 시각을 극복하고 인종·종교·국적 등에 따른 구분 없이 인권을 보장하도록 한 난민협약의 정신을 존중할 지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밝혔다.
향후 EU 회원국 간 우크라이나인 난민 배분 문제도 쟁점이 될 전망이다. 9일 기준 우크라이나인 난민은 폴란드 120만명, 헝가리 19만, 슬로바키아 14만, 루마니아·몰도바 각각 8만명 등에 머물고 있다. EU 내에서 상대적인 빈국들에 난민들이 몰리면서 경제적 부담과 사회통합 우려가 나오고 있다. EU 집행위는 지난 8일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한 회원국에 5억유로(약 6794억원) 상당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에 앞장서는 영미권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실제 우크라이나 난민의 재정착을 지원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난민 위기 대응이 수사(레토릭)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은 전쟁 이후 영국에 가족이 있는 우크라이나인에게만 한정해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그마저도 비자를 신청한 우크라이나 난민 1만7700여명 중에 300명에게만 비자가 발급됐다. 특히 프랑스 칼레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오려던 난민 600여명이 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입국이 거부돼 논란이 일고 있다.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부 장관은 영국측에 서한을 보내 “인류애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난민 우호국으로 정평이 난 캐나다는 ‘캐나다-우크라이나 긴급여행 승인’ 제도를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최소 2년간 임시로 체류 자격을 부여하기로 했다. 캐나다에 올 수 있는 우크라이나인의 숫자를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아일랜드 등 일부 유럽 국가들과 달리 비자 면제 조치를 실시하지 않아 문턱이 높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캐나다 정부가 난민들의 신원 확인 절차를 위해 생체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고 온라인매체 더컨버세이션은 지적했다.
미국은 3월1일 이전에 미국에 온 우크라이나인에 임시체류자격(TPS)을 부여했다. 미국내 우크라이나인 7만5000여명이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계속된 포격과 공습을 피해 탈출한 난민들을 위한 대책은 아직까지 없다. 지난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수만명의 현지인을 미국으로 데려온 것과 대비되는 행보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4일 사설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인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의회 없이도 대통령이 결단할 수 있다. 이것은 용감하고 근면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물론 전 세계의 동맹과 단결하는 기회가 될 것이며, 미국 경제에 필요한 노동력도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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