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 순회특파원, 우크라-폴란드 접경을 가다 ②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의 폴란드 제슈프-야시온카 공항 내 임시 미군 기지.
수송기가 폴란드 제슈프-야시온카 공항 내 임시 미군기지에 도착한 모습. 김현기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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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어둑어둑해진 27일 오후 5시(한국시간 28일 새벽 1시) 기지 내 활주로에는 보잉 C-17 글로브마스터III 전략수송기가 착륙했다. 그리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물자가 속속 대기하던 트럭으로 옮겨 실어졌다. C-17에서 800m 떨어진 곳에는 증파된 미군들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 막사가 만들어졌다.
취재진이 활주로 옆길을 따라 막사 쪽으로 접근하자 자동소총을 든 미군 2명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밑으로 내렸던 총구를 앞으로 향한 채였다. 미군 한 명은 취재진에게 신분증을 요구하고 촬영한 사진을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나머지 한 명은 기자의 얼굴을 찍으며 "당장 기지에서 멀어져라"고 소리쳤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을 개시함과 동시에 핵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양동작전을 펼치면서 미군 기지 내도 긴장감이 팽팽했다.
폴란드 제슈프 지역 인근 미엘레츠 미군기지 모습. 김현기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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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슈프 인근 미엘레츠 미군기지 내 모습. 김현기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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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침공을 피해 피난 온 한 우크라이나 가족이 코르초바 국경 인근 임시 난민수용소 ‘비에드롱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현기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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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슈프 인근 폴란드 동남부 미엘레츠 미군 기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치누크와 블랙호크 헬기 등이 배치돼 기지 철조망 밖에선 완전 무장한 병력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임시 숙소로 보이는 텐트에선 폴란드에 증원 급파된 4700명 중 일부가 비상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사 300m 가량 앞쪽으로는 의무부대 헬기로 보이는 수송기가 부지런히 뜨고 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5일째가 되고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가 선전을 거듭하면서 폴란드 국경선 근처도 처음과는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 서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코르초바 국경을 들렀을 때 그랬다.
폴란드 코르초바 국경 인근 임시 난민수용소 ‘비에드롱카’ 내부 모습. 우크라이나에서 빠져나온 피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김현기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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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소에서 차로 5분 거리의 도매센터 '비에드롱카'는 국경을 넘어 온 난민들로 북새통이었다. 어림잡아 2000명 이상은 돼 보였다. 26일부터 임시 피난민 보호소로 운영되기 시작한 이곳에는 간이 침대와 음식물, 의약품들이 대거 마련돼 있었고, 코르초바 검문소를 통과한 난민들이 약 30분 간격으로 버스를 이용해 이곳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다.
전장을 벗어난 기쁨 때문일까 일부 난민은 중앙에 마련된 마이크를 붙잡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말미에 폴란드어로 "젠쿠예(고맙다는 뜻)"를 외치자 피난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딸 야나(8)와 안드레이(6)을 데리고 우크라이나 테르노플을 빠져나왔다는 알리나(43)는 아이들 손을 꼭 잡고 "남편을 두고 왔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크라이나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나와 안드레이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산다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크만(38)은 "'조국을 위해 싸우러 간다'며 군에 입대한 우크라이나인 친구들의 부탁으로 그들의 가족을 대신 데리고 여기로 빠져나왔다"며 "그런데 한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 어느 쪽 편이냐"고 물었다.
기이한 풍경도 보였다. 우크라이나의 18~60세 남성에겐 총동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피난민 보호소엔 대부분 여성이나 어린이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딱 봐도 80%이상이 남성이었다. 인종도 흑인, 아랍계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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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폴란드 자원봉사 요원은 이유를 묻는 기자를 살짝 구석으로 불러내더니 귓속말로 "사실 불법 난민으로 입국이 금지되던 이들이 이번 사태로 대거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폴란드로 교묘히 오고 있다. 아마 그들은 조금 있다 꿈에 그리던 독일이나 프랑스로 갈 것이다. 여기 보호소에 우크라이나 사람은 극소수"라고 귀띔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우크라이나인들의 슬픔, 유럽 입국이란 절호의 기회를 잡은 기타 난민들의 기쁨이 피난민 보호소에 혼재돼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다 이곳 봉사요원에 자원했다는 루카스(36)는 "여러 곳에서 구호물품이 쇄도하고 있어 너무나 고마울 지경"이라며 "이곳에서 쓰다 남은 것들은 모두 우크라이나로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폴란드 한인연합회(회장 남종석)도 마스크·코로나 자가진단 키트 등을 이곳 보호소에 기증했다.
열차편으로 우크라이나를 빠져 나오려는 이들은 이날도 쇄도했다. 우크라이나 서부 거점도시 리비우역에서 폴란드 국경도시 프셰미실 중앙역까지는 통상 2시간 정도 걸리던 것이 이날 20시간 가량 소요됐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꽉 들어찬 상태였다. 유엔과 유럽연합(EU)은 27일까지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온 이들은 36만8000명으로, 앞으로 최대 7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이날 우크라이나행 열차가 오가는 폴란드 국경 도시 프레미시우 중앙역과 메디카·크라코베츠 검문소 등에서는 우크라이나 군에 입대하기 위해 귀국하려는 우크라이나 청년들이 몰렸다. 폴란드 국경수비대는 지난 24일부터 이날까지 약 2만2000여 명이 국경초소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제슈프·코르초바·프셰미실(폴란드)=김현기순회특파원kim.hyun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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