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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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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살 불상 첫 외출 뒤엔…'한석규 옆 그 스님' 결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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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684년 만들어진 뒤 2021년 처음으로 절 밖에 나와 사람들 앞에 선 보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삼존불(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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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이면 할 수 있겠다”

높이 2m 65㎝의 거대한 목각탱(나무에 새겨 그린 불화)이 만들어진 지 337년 만에 처음 법당 밖으로 나선 건 큰 스님의 이 한 마디 덕이었다.

다음달 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조선의 승려 장인’ 전시장 마지막에 큰 사각형의 금색 설법상(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상)이 서 있다. 불경의 내용을 조각한 목판을 여러 조각 맞붙여 금을 덧칠한 뒤, 사각형 틀 안에 담은 이 작품은 경북 예천 용문사에 있던 보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다. 1684년 조각승 단응(端應)이 만든 뒤 내내 용문사 불당에서 스님과 신도들을 맞다가, 337년 만에 처음 절문 밖으로 나섰다.



337년만의 외출 허락, 광고 속 대나무밭 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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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SKT TV 광고.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한석규의 내레이션으로 화제가 됐다. 사진 S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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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의 외출을 허락한 건 용문사 주지스님인 청안스님이다. 1998년 SKT TV 광고에서 한석규와 함께 대밭을 걷던 ‘그 스님’이다. 워낙 크기가 큰 탓에 혹여나 훼손될까 봐 절 문을 나서는 것부터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박물관 측의 설명을 들은 청안스님이 “중박이라면 괜찮겠다”며 허락했다. 이애령 미술부장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사찰의 보물을 처음 세상에 내놓는 결정을 하기 쉽지 않은데, 다 주지스님이 긴 고민 끝에 큰 결심해주신 덕분”이라며 “덕분에 설법상 앞에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까지 나란히 함께 앉은 귀한 모습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명희 학예연구관은 “이 정도 큰 목각탱이 전시에 나온 적도 없고, 삼존불까지 같이 나온다는 소식에 불교미술을 연구하시는 분들도 ‘정말이냐’고 되물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2년 전국 사찰 누볐다, 스님 마음 얻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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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목각아미타 여래 설법상과 앞쪽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만들어진 지 337년만에 처음으로 절 밖으로 나왔다. 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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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의 145점 불상·불화 중 54점은 전국 15개 사찰의 허락을 얻어 잠시 빌려왔다. 스님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6명이 2년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전시에 참여한 사찰은 15곳이지만 실제로 찾아다닌 곳은 몇 배가 넘는다. 과거에 사찰 문화재 도난사건도 많았고, 혹여 이동 과정 등에서 손상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사찰이 많아, 스님들을 설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애령 미술부장은 “스님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다’는 인식을 드린 뒤에야 마음을 내주신다. ‘저희도 불상에 진심입니다’를 보여드리는 게 우선”이라며 “대부분 최소 3번은 찾아간 뒤에야 이번 전시를 위한 불상·불화를 빌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박물관 측은 용문사 목각설법상의 운송을 위해 별도의 나무 틀을 만들어 지지하고, 특수 운송 차량에 실어 옮겨왔다. 유수란 연구사는 “보살상이 들고 있는 지물(손에 들고 있는 연꽃가지 등의 상징물), 분리되는 손 등은 미리 따로 포장해두고, 불상을 모셔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예사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워낙 흔치 않은 일이라, 전시 준비 과정 영상에도 담았다.



지금도 절 올리는 불상 흔쾌히 내준 곳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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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승려 장인 전. 조선 초기(1482년) 불상인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앞)은 허리가 꼿꼿한 데 비해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불상(뒤)은 자세가 덜 꼿꼿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자세다(목조비로자나여래좌상, 1622년). 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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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점, 보물 13점을 포함한 귀한 불교미술품을 한 시기에 한 자리에 모으는 것도 일이었다. 지난해 12월 6일부터 시작한 전시를 앞둔 직전 일주일간은 하루종일 쉴 새 없이 전국에서 불상과 불화가 모여들었다. 유수란 연구사는 “절 밖으로 나간 불상의 보존‧보안에 대해 스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셔서, 최대한 전시 직전에 전시품들을 모았다”며 “스님들이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리는 불상이 전시에 나오는 경우 그 절은 예불을 드릴 부처님이 없어지는 상황이라, 최대한 늦은 일정으로 모셔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에 공개된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국보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그랬다. ‘동지법회’가 끝난 뒤 서울로 모셔와, 지난해 12월 25일부터 지난달 22일까지 4주만 공개된 뒤 ‘입춘법회’를 앞두고 흑석사 법당으로 돌아갔다.

열흘 남짓 남은 이번 전시의 초입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조선 전기 불상과 앞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조선 후기 불상이 한자리에 앉아있다. 허형욱 연구관은 “조선 후기 들어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신도가 늘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불상을 볼 수 있게 불상의 단을 높여 만들었다”며 “그 전까지 허리를 펴고 있던 불상들이 이때부터 얼굴도 살짝 아래로 숙여, 신도들을 향해 있다”고 설명했다.



어깨의 붉은 '일(日)‘, 정약용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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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승려 장인' 전. 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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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춤에 붉은 글씨로 ‘일본(日本)’이라고 쓰인 해남 대흥사 천불(천 개의 불상) 중 3점도 이번 전시에 나왔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 재건을 위해 경주에서만 나는 돌로 1000개의 불상을 만들어 배 두 척으로 옮기던 중, 태풍을 만나 768개를 담은 배가 일본까지 떠밀려 갔다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얽혀있다. 허형욱 연구관은 “불상을 모시고 온 사람들이라 해서 일본에서도 7개월간 귀하게 대접하다가 돌려보냈다”며 “마침 당시 유배 중이던 정약용이 ‘일본을 거쳐 온 불상에는 표시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일(日)‘또는 '일본(日本)'이라고 쓴 불상이 아직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이애령 미술부장은 “여러 불교미술 전시를 계속 기획하고 있지만, 사찰에서 직접 이렇게 많은 불상을 내준 전시는 앞으로도 드물 것”이라며 "스님들도 사찰에 모시던 부처님이 전시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맞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더라"고 전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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