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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배달부처럼, 시가 불어터질까 걱정하던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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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해 초 타계한 시인 최정례. 지난 19일 1주기 추모 낭독회가 열렸다. 반짝이지만 결국 흘러가기 때문에 슬프다는 뜻일까. 추모회 이름이 ‘빛그물 반짝임 흐름 슬픔’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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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시인은 이를테면 마감에라도 쫓기는 것 같다. 그런데 편하지는 않은 상황을 능청스럽게 고백한다. 시는 뭔가 고상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것 같다. 짜장면 말이다. 무슨 얘길까.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의미가 분명해진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짜장면 배달부가 흔히 처하는 난경(어려운 처지)에 대한 진술이다. 주문받고 달려가면 면발이 불어버리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주문 전에, 주문도 없이 출발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시련이 짜장면 배달부만의 것인가.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언제나 서두르고 뭔가를 기다리지만, 되는 일은 없는. 그래서 서성일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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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인의 ‘병점’을 낭독하는 김영승 시인. 생전 최정례 시인이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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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문장은 지난해 이맘때(2021년 1월 16일) 세상을 뜬 고 최정례 시인의 시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의 일부다. 고인이 미당문학상을 받은 2015년 출간한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에 실렸다. 1주기에 맞춰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연남동 문화공간 진부책방스튜디오에서 열린 추모 낭독회. 후배인 이현승 시인이 낭독했다. “한국어로 똑같은 뭔가를 하는 사람인데도, 처음 보는 느낌, 놀랐던 시 중 한 편”이라는 게 낭독시로 선택한 이유다.

1955년생. 30대 중반인 90년 등단. 30년 넘게 시에 매달렸지만, 그렇다고 불꽃 같은 삶이었다는 표현은 어딘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김혜순·김영승·이수명 등 이날 모인 시인·평론가·유가족은 직진, 돌직구, 이런 어휘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억했다. 시 쓰는 데서나 관계에 있어서나 에두르는 법이 없었다고들 했다.

신철규 시인이 대신 읽은 회고담에서 김승희 시인은 “최정례 시인이 ‘억울함 때문에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전 세계 유일한 시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자기 포장이 없었다는 얘기다. 오연경 평론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작시를 보내며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 의견을 구했다”는 사연을 소개했다. 그런 질문이 최정례의 시 세계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낭독한 시가 ‘입자들의 스타카토’. 이렇게 흐르는 시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당신은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 아직 삶이 있는 나는/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없는 걸까/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으로/ 강물이 흘러간다.” 농담처럼 눈발이 흩날리는 오후였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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