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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스페셜리스트] '염전 노예'는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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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판다] 아직도 '노예'가 있다

"우리는 모두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석탄을 얻기 위한 과정이 어떠한 것인지는 떠올리지 못한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말입니다. 그가 당시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기록한 게 1937년. 그런데 85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우리가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야 할 열악한 노동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염전입니다.

2014년 신안 염전 노예 사건과 함께 대대적인 조사가 진행됐지만 염전 노동 실태에 대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은 다시 염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지난해 10월 신안 염전에서 노동 착취를 당했다는 박영근 씨의 폭로에도 박 씨의 동료 대부분은 염전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염전, 고통스러운 기억




박 씨는 약 7년 간의 염전 생활 동안 짐승 같은 취급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박영근 / 염전 노동 피해자]
"하루에 2시간도 자고 1시간도 자고, 사람이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짐승도 잠 안 재우면 주인 깨물고 하대요."


임금은 제대로 못 받았고, 감시를 당했다고 했습니다.
[박영근 / 염전 노동 피해자]
"서너 달에 한 번씩 20, 30만 원씩 넣어주고." "아예 CCTV 설치를 해놓고 감시를 하는데 그러면 그게 감금 아니고 뭐냐."


염전을 빠져나오기로 한 것은 어려운 결심이었습니다.
[박영근 / 염전 노동 피해자]
"다른 노동자도 새벽에 도망갔다가 잡혀 왔어요. 그래서 엄청 두드려 맞았어요. 나는 바닷물 푸다가 아무도 없어서 기회다 해서 내가 나왔죠. 산으로 막 튀었지."


염전 일부만 1년 간 영업 정지 조치를 받았고 운영자 가족이 그대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에 박 씨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염전 소유주인 태평염전 측은 "운영자 일가에게 계약 종료를 통지했으나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모습을 보여 명도 및 손해배상 청구를 예고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박영근 / 염전 노동 피해자]
"(안 나가고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아, 그래요? (…) 조금 있다가 하면 안 될까요? 조금 있다가 합시다. 하."


몸과 마음의 상처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박영근 씨 가족]
"동생이 지금도 조금만 얘기하면 울어요. 지금 치아가 하나도 없지. 이가 다 내려앉았어요. 어금니 조금밖에 없는데… 발톱도 동상이 걸려서 그냥 생 발톱이 막 빠져 날아가요."


박 씨는 그래도 도와줄 가족이 있어 다행이라며 염전에 남은 동료들을 돕고 싶다고 말합니다.
[박영근 / 염전 노동 피해자]
"저는 그래도 누나라도 있어 천만다행이지만. 그 사람들도 내가 데리고 와서 지원을 받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나처럼 돈을 싹 받아내고 그랬으면 좋겠네."


박 씨에게 합의금 400만 원을 제시했던 고용노동청 목포지청은 재조사 끝에 8천만 원 넘는 임금이 체불됐다고 밝혔습니다.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피해자



박 씨 동료들의 임금 체불 여부는 아직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박 씨가 일했던 염전에 찾아가 여러 차례 피해 여부를 물었는데 대답을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피해 염전 노동자 동료]
"아닙니다. 월급은 매달 나옵니다." "억울한 거 없으니까 빨리 가시라고."


자신들의 명의로 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사용한 혐의로 구속된 염전 운영자 측의 주장만 되풀이했습니다.
[염전 운영자 가족]
"우리가 돈 더 줬으면 줬지 덜 주지 않았어요."
"애들이 막 요령 피우고 그러면 '이놈들 막 이제 빨리빨리 안 하냐' 이렇게 가족이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걔들을 뭐 때리고 그랬겠어요. 얘기하다 보면 답답하면 욕은 할 수 있겠죠."
"외출 못 하게 한 적은 없어요. 당연히 어디 갈 때는 이야기를 하고 가야지요. 일이 없으면 다녀오겠다, 그러면 갔다 와라,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얘들은 여기서 24시간 같이 생활을 하는 애들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