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신년 기자회견 중 한은희 수어통역사(왼쪽)가 윤 후보의 말과 제스쳐를 수화로 옮기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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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왜 거기에 서 있나.”
한은희(56) 수어통역사는 요즘 지인들에게 이런 연락을 자주 받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옆에서 수어 통역을 하면서 생긴 일이다. 한 씨는 지난 11일 윤 후보의 신년 기자회견부터 주요 행사 때마다 윤 후보의 말을 청각 장애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선대본부 쇄신 작업을 맡았던 한 인사가 “약자에게 더 낮게 다가가야 한다”며 윤 후보에게 수어통역을 제안한 결과다.
한 씨와 윤 후보는 별다른 인연은 없다. 한 씨는 KBS 뉴스를 포함해 30년 가까이 수어통역을 해왔지만 국민의힘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그가 주로 함께 일을 해왔던 건 정의당과 같은 진보 정당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수어에 좌우 이념이나 정당은 중요하지 않다”며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의 알 권리”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KBS뉴스 수어 통역을 하는 한은희씨의 모습 [KBS뉴스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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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윤석열 후보 통역은 어떻게 맡게 됐나
A : 국민의힘 행사를 처음 맡은 건 지난달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윤 후보 선대위 출범식이었다. 이후 연락이 없다가, 지난달 11일 윤 후보의 신년 기자회견을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때부터 후보 기자회견 통역을 하고 있다.
Q : 야당 대선 후보 통역인데 부담은 없었나
A : 오히려 반가웠다. 장애인들의 알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수어에 좌우 이념이나 정당은 중요하지 않다. 이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수어 통역을 제공하는 셈이니(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보다 앞서 수어통역사를 기자회견에 배치했다) 청각장애인들이 더 많은 대선 후보의 입장을 알 수 있게 돼서 기뻤다.
지난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외교안보 공약을 발표할 당시 한은희씨가 수어 통역을 하는 모습. 김상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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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윤 후보의 말이 길고 추임새가 많단 지적이 있는데, 통역에 어려움은 없나
A : 윤 후보의 말이 빠른 편은 아니라서 괜찮다. 수어통역사 입장에선 윤 후보의 말뿐만 아니라 행동과 감정, 추임새까지 모두 통역해야 한다. 후보가 질문을 받고 잠시 침묵할 때는 그 침묵도 함께 통역한다. 청각장애인에겐 내 수어만 보이기 때문에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 윤 후보가 이른바 ‘도리도리’를 하면 나도 따라서 도리도리를 하고, 후보가 추임새를 넣으면 그것도 수어나 몸짓으로 보여줘야 한다.
Q : 정치에서 수어 통역은 아직 낯설단 사람도 있다.
A : 처음 국회에서 수어 통역을 한 건 2019년 추혜선 당시 정의당 의원 기자회견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회 기자회견 때 수어 통역 지원이 없었다. 추 의원이 처음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이후 추 의원 기자회견 때마다 통역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국회 기자회견이 열리는 소통관에 통역사 3명이 배치됐다. 국회 수어 지원 법도 개정됐다. 지금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리는 기자회견 수어통역 지원을 하고 있다. KBS 아침 뉴스광장 수어 통역도 하는 중이다.
국민의힘 유튜브에서 생중계됐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신년 기자회견. 후보를 클로즈업하다 보니 한씨의 수어 통역이 일부만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유튜브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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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수어 통역과 관련해 정치권에 건의할 점이 있다면
A : 윤 후보의 기자회견 뒤 주변에서 내 팔꿈치만 보인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내가 후보와 조금 떨어져 있고, 카메라가 후보를 클로즈업하다 보니 수어 통역을 해도 방송에선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가능하다면 후보 기자회견 때마다 속기사가 문자 통역도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국회 기자회견에서 수어 통역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건 추혜선 전 정의당 의원이다. 추 전 의원은 2019년 4월 일정 비율 이상의 한국 영화는 한국수어·자막·화면해설을 제공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발표하며 수어 통역사를 대동했다. 이후 모든 기자회견을 수어통역사들과 함께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가운데)이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돼 국회 기자회견에 수어 통역 지원은 의무가 됐다. 2020년 11월 차별금지법 제정 기자회견을 하는 장 의원과 이를 통역하는 한은희씨(오른쪽)의 모습.오종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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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전 의원의 움직임에 국회사무처는 2020년 8월부터 소통관에 수어통역사 3명을 배치했다. 같은 해 12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국회 입법활동 중계 시 수어 통역 지원은 의무가 됐다. 정부에선 2019년 12월부터 공식 브리핑에 수어통역사를 배치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직 예산과 인력 문제로 전담 수어통역사가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20년 5월 청와대에 수어 통역 제공 권고 결정을 내렸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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