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냉전해체·독일 통일 협상 때
미·독 “나토 동진 않는다” 구두 약속
구속력 있는 서면 약속은 이뤄지지 않아
30년 흐른 지금까지 미-러 분쟁 불씨 돼
1991년 8월1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 주변 도로에서 시민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소련 공산당 강경파 쪽 탱크의 진입을 온몸으로 저지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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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전운을 드리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생한 ‘핵심 원인’은 냉전 해체 이후 끊임 없이 이어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장 때문이다. 러시아는 미국이 독일이 통일되고 냉전이 해체되던 1990년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나토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미국은 당시 소련과 협상에서 나토의 확장 금지에 대한 ‘공식 보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 서독의 지도자들은 소련과 협상 과정에서 그런 언급을 했고, 이를 통해 독일 통일에 대한 소련의 양해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소련은 서구의 선의를 믿었지만, 이는 구속력이 없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나토는 2차대전 직후인 1949년 미국이 소련의 위협에 맞서 유럽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만든 집단안보기구이다. 헤이스팅스 이즈메이 초대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냉전 시기 “소련을 막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독일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애초 목적인 소련의 위협을 성공적으로 막았을 뿐 아니라,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유럽에 녹아 들게 하고, 미국을 확실히 유럽에 붙들어 매는 등 여러 면에서 훌륭히 기능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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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0년의 세월이 흘러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붕괴됐다. 냉전이 종식되며, 독일 통일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독일의 운명을 정할 핵심 변수는 소련의 반응이었다. 서독은 통일을 목표로 주변국들과 적극적으로 타협을 시도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권 이탈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고르바초프는 냉전 이후 소련의 안전 보장을 위해선 서구의 군사동맹인 나토가 현재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고 봤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당시 서독 외무장관은 1990년 2월6일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교장관에게 “나토는 동쪽으로 영역을 확장한 의도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3일 뒤인 2월9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고르바초프를 직접 만났다. 베이커는 “최종 결과: 통일 독일은 (정치적으로) 변화된 나토에 고정된다. ’나토의 관할 영역은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말을 직접 메모했다. 회담 뒤 베이커 장관은 곧 소련을 방문하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에게 비밀 편지를 전했다.
이 편지에서 베이커는 자신이 고르바초프에게 한 제안을 밝혔다. “통일 독일이 나토 밖에 있기를 선호하는가, 그래서 독일에 미군이 주둔하지 않고 완전히 독립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토의 관할권이 현재 영역에서 ’한 치도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보장 하에서 통일 독일이 나토와 엮여있기를 원하는가?” 고르바초프는 “나토의 영역 확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이 통일이 되어도 나토가 동독으로 확장되어선 안 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 매파들은 베이커-고르바초프의 타협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토가 어떻게 한 나라의 반쪽에만 적용될 수 있냐”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도 이에 동조하는 편지를 써 콜 총리에게 보냈다. 나토가 동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베이커는 ‘나아갈 수 없다’, 부시는 ‘나아갈 수 있다’. 콜에게 미국의 서로 다른 입장이 전달된 것이다.
탈냉전시대 협상 파트너였연 헬무트 콜(오른쪽) 전 독일 총리와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2001년 9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 바르비카에 있는 옐친의 집에서 만나 옐친의 부인 나이나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반갑게 껴안고 있다. 바르비카/AP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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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은 모스크바를 설득하기 위해 베이커의 온건한 의견을 따랐다. 그에 따라 “본질적으로 나토는 동독의 현 영토로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없다”고 약속했다. 이 얘기를 들은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통일을 지지하기로 한다. 그날 밤 콜은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 추운 붉은광장을 밤새 산책했다. 이 과정에 서면합의는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격노했다. 2월24~25일 캠프데이비드 산장에서 이뤄진 콜과 회담에서 “빌어먹을! (냉전에서) 우리가 이기고 저들이 졌다. 소련이 패배의 아가리에서 벗어나 승리를 낚아채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부시는 이어 서독이 “두둑한 주머니”를 갖고 있으니, “소련이 (동독에서) 나가도록 매수하라”고 말했다. 부시는 ‘소련군이 철수한 뒤 통일 독일은 미군이 주둔하는 나토 회원국으로 남을 것’이라며 독일 통일에 소극적인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등을 달랬다.
독일 통일이 시작된데다 소련의 내정까지 불안해지며, 고르바초프는 무력해졌다. 콜은 1990년 7월부터 9월까지 철수하는 소련군에게 총 150억마르크를 제공했다. 또, 동독에 나토 군과 핵무기 배치를 제한한다는 체면치레용 약속도 했다. 이 모든 약속이 상호 신뢰에 기초한 구두 약속이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나토 확장에 대한 서면으로 된 어떤 공식 보장도 받지 못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중견 간부가 현지에서 지켜봤다. 그는 “어떻게 소련이 동유럽에서 지위를 잃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비탄하며 동독을 떠났다. 새로운 비극의 씨앗은 이렇게 싹트기 시작했다.
역사의 패자가 된 고르바초프는 2014년 러시아 언론 <리아 노보스티>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당시 베이커와 회담에서 “나토의 군사시설이 전진하지 못하고, 추가적인 군 병력이 독일 통일 뒤에도 동독 영토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고 말했다. 또 1999년 이후 많은 나라들이 나토 가입을 결정한 일들은 “1990년에 우리에게 했던 언명과 보장들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부시의 뒤를 이은 빌 클린턴 대통령은 애초 나토 확장에 신중한 자세였다. 소련과 국경을 마주한 나토 회원국인 노르웨이의 전례 따라 외국군과 핵무기 배치를 금지한 ‘스칸디나비아 모델’을 동유럽 국가나 옛 소련 국가들에 적용하려 했다. 그에 따라 ‘평화를 위한 동반자’(PfP) 프로그램을 1994년 만들어 이들 국가를 가입시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최근 소련 해체 뒤 경제난 때문에 택시 운전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모스크바 대통령 별장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태우고 1956년형 볼가를 운전해 보이던 때의 모습.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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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매파들은 이런 조처는 러시아에게 나토 확장에 대한 비토권을 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도 1차 체첸 내전을 강경 진압해 강경파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워싱턴에서 ‘신봉쇄’라는 개념이 나왔고, 11월 중간선거에서 나토 확장을 공약으로 내 건 공화당이 승리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선거 직후인 12월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대하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사임했다.
1999년 3월 마침내 폴란드·체코·헝가리가 나토에 가입했다. 한달 뒤인 4월 나토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옛 소련 공화국에 속했던 나라를 포함한 9개국의 가입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11월 이스탄불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옐친은 “미국은 유럽에 있지 않다. 유럽은 유럽인들이 처리하게 해야 한다”며 나토가 러시아에 근접하는 것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는 회담장을 나서며 푸틴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은 집권 후 동진해 오는 나토 확장에 맞서기 위해 2008년 조지아 전쟁,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 내전을 일으켰다. 푸틴은 지난 12월23일 연말 기자회견에서 “그들이 우리를 속였다. 단호하고, 뻔뻔하게 나토가 확장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9일 “나토는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고, 그럴 수 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나토 역시 누리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나토 동맹은 만장일치로 결정을 하고 이 모든 것은 기록된다. 나토가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한 지도자가 개인적으로 한 장담이 동맹의 합의나 나토의 공식 조약을 대체할 순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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