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탈레반 정부와 협상... 인권 보호 명분 내세우나
탈레반 '합법 정부 인정', '동결 자산 해제' 심산
토머스 웨스트(맨 왼쪽) 미국 아프가니스탄 특사가 24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탈레반과의 회담에 앞서 아프간 내 인권운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슬로=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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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꾀에 당할 것인가.
서방국들이 잇따라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극단주의 무장세력 탈레반과 마주 앉는다. 굶주리고 헐벗은 아프간 국민들의 인권을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인데, 탈레반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동결된 자산까지 해제시키는 ‘일석이조’의 기회로 삼고 있다. 회담 주도권을 탈레반이 쥐고 있는 모양새다.
2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미르 칸 무타기 외무장관이 이끄는 탈레반 대표단은 이날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3일간 미국 등 서방국 외교단들과 잇따라 회담한다. 이번 회담은 서방 측 제안으로 성사됐다. 탈레반은 지난해 8월 아프간 점령 이후 처음으로 서방국가를 방문했다.
미국 등 서방은 이번 회담을 통해 탈레반에 포용적 정부 구성, 아프간 내 인권 보호 등을 요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이 조건을 이행하지 않으면 경제 제재 해제나 합법적 정부 인정 등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이후 해외자산 동결, 해외원조 중단 등의 여파로 아프간 내 경제난이 크게 악화했다. 유엔은 아프간 전체 인구의 98%가 굶주림을 겪는 등 식량위기가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말 유엔은 아프간에 44억 달러(약 5조2,600억 원)의 긴급 구호 자금을 투입했다. 경제적 빈곤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서방이 회담을 요구한 것이다.
탈레반과의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23일 노르웨이 오슬로 외무부 청사 앞에서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펼치고 시위를 하고 있다. 오슬로=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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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탈레반은 전혀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날 첫 일정을 마친 샤피울라 아잠 탈레반 외교담당은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로서 공식 인정받는 절차”라며 “이 같은 소통을 통해 아프간 정부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회담을 갖는 것만으로도 국제사회에서 탈레반을 아프간에서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았다고 본다는 얘기다. 로이터통신도 “이번 회담이 국제사회에 탈레반의 공식 외교무대로 비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탈레반은 아프간 국민들의 인권 보장을 명분으로 국제사회가 동결한 자국 자산 100억 달러(약 11조9,000억 원) 해제마저 얻어낼 심산이다. 실제 이날 탈레반 교육부는 3월 21일부터 남녀 모든 연령대의 학생에게 학교를 재개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서방의 요구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 등이 “교육과 보건 등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분야에서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유엔도 의료인과 교사 등 공공부문 근로자에 급여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간접 지원도 등에 업은 상태다.
탈레반을 아프간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서방국들이 탈레반에 끌려가는 꼴이 되면서 반발도 거세다. 이날 회담이 진행된 노르웨이 외무부 청사 앞에는 시위대 200여 명이 모여 탈레반과의 공식 회담을 추진한 노르웨이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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