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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천상계 대통령’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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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왼쪽)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지난해 11월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중앙일보 주최로 열린 ‘2021 중앙포럼’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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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김태규 | 정치팀장

“부서 운영 과정에 건의사항 있는 사람은 얘기를 좀 해주시고.”

김 부장이 회의를 마무리하면서 의례적으로 던진 말이다.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보장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이 정도 말은 해줘야 하니까.

“없어? 없으시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저, 잠시만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박 대리에게 쏠렸다.

“응, 얘기해봐.” 김 부장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기탄없이 말해보라는 신호를 줬다. 속마음과 다르게.

“저… 부장님께서 의견 수렴을 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단적으로 결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부서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뭐?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어느 직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 아닐까. 기습적인 ‘팩트 폭행’에 김 부장은 과연 웃으며 대처할 수 있었을까.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군주론>에서 “진실을 듣더라도 자신이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다. 직언에도 귀가 열려 있음을 각인시켜야 충신이 남고 잘못을 교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마키아벨리가 상정한 ‘군주’는 전지전능한 ‘철인 이상형’이었다. 저 정도의 비범한 능력이 돼야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군주정이 공화정으로 진화했어도 ‘비판을 온화하게 경청하는 권력자’를 기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해 연말 부인 김건희씨 허위이력 논란에 “관행이라든가 이것에 비춰봤을 때 어떤 건지 좀 보고 (보도)하라. 저쪽에서 떠드는 거 듣기만 하지 마시고”라며 언론을 향해 화를 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지난해 9월 대장동 개발 의혹이 불거지자 “민간개발 특혜 사업을 막고 5503억원을 시민 이익으로 환수한 모범적 공익사업”이라며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일부러 가짜뉴스를 뿌리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지지율 하락을 경험한 두 후보 모두 발끈했던 과거를 반성했지만, 쓴소리에 의연할 수만은 없는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한 ‘서생적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은 이성의 영역이다. 감정적인 대응은 일을 그르친다는 건 당위로 존재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힘을 가진 권력자의 ‘격정’은 위험하다. 김건희씨가 기자와 한 통화에서 밝혔듯이 ‘그’의 감정만으로 “안 시켜도 알아서 경찰들이 입건”하는 게 권력의 작동 원리다. 그런 방식을 포함한 갖가지 권력 사유화와 농단으로 감옥에 간 대통령이 여럿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그만하자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승자독식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유력 대선 후보들은 권력 제한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재명 후보가 제시한 ‘대통령 4년 중임제’는 실패한 대통령의 임기를 1년 단축하는 의미 정도이지, 권력 분산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직선제 개헌 이후 ‘5년 단임이어서 너무 아쉽다’는 평가를 받은 대통령도 전혀 없었는데 연임을 허용하자 하니, 번지수를 잘못 짚은 듯하다. 윤석열 후보는 수석비서관실, 대통령 부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제2부속실 폐지 등으로 ‘청와대 기능 축소’를 홍보하는데, 조직을 없앤다고 기능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비선 실세의 뜻을 받들어 대통령을 보좌했던 ‘문고리 3인방’은 수석비서관보다 직급이 낮은 비서관들이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중간평가 약속은 대통령 권한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로 읽힌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만이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의 인사제청권 확립 등을 내걸고 “대통령 중심제를 의회 중심제로 전환하기 위한 ‘슈퍼대통령제 결별 공동선언’”을 다른 후보들에게 제안했지만 반향은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데 그것도 권한과 능력의 괴리가 크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과거 유능함을 인정받았던 대통령도 청와대를 떠날 땐 박수받지 못했다. 이제 천상계에 올려놓았던 대통령제를 사람 능력치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 사람이 자리를 만들어야 할 때다.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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