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 낫한 스님은 명상을 현대인에게 일상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게끔 쉽고 구체적으로 전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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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설립한 프랑스의 수도공동체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는 이날 “2014년부터 틱 낫한 스님이 뇌출혈로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고, 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몸짓으로 했다”며 입적 전 틱 낫한 스님의 상태에 대해서도 밝혔다.
고인은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16세 때 출가했다. 61년에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코넬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반전 평화 운동을 펼쳤다.
틱 낫한 스님과 제자들이 반전 평화 운동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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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탄압에 대한 저항 운동과 반전 평화 운동에 대한 공으로 67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그런데 그 해에는 노벨평화상이 누구에게도 수여되지 않았다. 틱 낫한 스님의 지구촌 평화 운동을 저지하고자 베트남 정부는 귀국 명령을 내렸고, 틱 낫한 스님은 73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2005년이 돼서야 비로소 틱 낫한 스님은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장기 망명한 팃 낫한 스님은 프랑스에서도 난민 구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82년에는 프랑스 보르도 근처에 있는 수도공동체 ‘플럼 빌리지’를 설립했다. 플럼 빌리지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명상과 힐링을 찾는 현대인에게 커다란 마음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특히 서구인에게 불교식 명상의 현대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틱 낫한 스님은 2003년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당시 서울에서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주최 측은 틱 낫한 스님을 위해 따로 VIP용 승용차를 준비했다. 틱 낫한 스님은 “나는 함께 온 일행들과 움직이고 싶다”며 승용차 탑승을 거절하고, 대중과 함께 버스로 이동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절집에서 회자된다. 그는 대중과 함께하는 일상 생활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2003년 전남 장성군 소재 백양사를 찾은 틱 낫한 스님(오른쪽)이 서옹 스님(왼쪽)에게 선물을 받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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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 낫한스님는 미국에서도 ‘그린 마운틴 수행원’을 세워서 현대인을 대상으로 명상을 전했다.
저술 활동도 무척 활발했다. 『귀향』『화』『틱 낫한의 걷기 명상』『부디 나를 참이름으로불러다오』등 10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했고, 이중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상당수다.
뉴욕타임스는 21일 틱 낫한 스님의 부고 기사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어록을 하나 뽑았다. “태어남과 죽음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죽음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그들은 실제가 아니다.(Birth and death are only notions. No Death, No Fear. They are not real.)” 불교에서는 진리의 자리는 오고 감이 없다고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도 바다 위에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틱 낫한 스님의 불교적 이해와 수용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틱 낫한 스님은 베트남 출신이다. 반전 평화 운동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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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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