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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공감]빈 주사기를 꽂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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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신과 자신 이외의 것을 구별하는 것이 면역의 기본 원리다. 백신을 맞는 이유는 내 몸에 들어와 생명 활동을 위협할 수 있는 이물질에 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백신 접종으로 만들어진 항체는 혈액 속을 순환하면서 이물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이물질에 대한 정보는 기억 면역세포에도 저장되어, 유사시 이들과 맞서 싸울 전투병 세포를 동원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생명체를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통합 시스템이 면역이다.

경향신문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대한민국이라는 면역체계는 어떠한가? 부동산 공화국으로 빈부 차이는 더욱 벌어져 혈액의 쏠림현상이 시작되었고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는 조직이 괴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방은 이대로 몰락할 것인가? 이대남, 이대녀로 갈라진 젊은 심장은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심방과 심실을 오가며 좌우가 연결된 한 개의 온전한 심장만이 생명체를 살린다. 이대남, 이대녀를 20대 젊은이 하나로 돌려놓아야 한다. 팬데믹과 자영업자, 노동자, 환경 이슈 등 피 순환의 불균형 속에서 <오징어 게임>과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글로벌 K문화의 골든글로브 수상에 손뼉을 쳐야 했다. 병이 깊어지면 치료할 기회마저 놓친다. 백신 접종도 때가 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배가 안개 속을 항해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안개 속을 헤쳐 나갈 유능한 선장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데 방향타를 잡을 선장 후보에 믿음이 가질 않는다. 항해지도를 볼 줄 아는 사람인지조차 의심이 간다.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야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왼쪽으로만 가도, 오른쪽으로만 방향을 틀어도 배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언제 어디서 방향을 전환할지, 몇 노트로 항해할지, 암초와 엄청난 해일을 만났을 때 배는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를 아는 기본기를 갖춘 선장이 필요하다.

위협은 모든 곳에 잠재되어 있다. 선장의 임무는 배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이끄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배에 오른 사람은 모두가 승무원이라는 하나의 이름뿐이다.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없고, 임시직과 고용직의 완장도 없다. 나이, 지위, 빈부의 차가 들어설 자리 또한 없다. 다만 항해사, 기관장, 조리사 등 역할에 따른 이름만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제대로 성공한 정책을 손꼽기는 어렵다. 일자리, 교육, 부동산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실패했고, 불통하는 대통령 이미지와 불공정한 세상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여권의 이재명이 지금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을 보여줘야 할 이유다. 무능한 정권을 끝장내고, 불의의 정권에 참지 말자는 윤석열의 대안은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위협적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나온 그의 선제적 타격론은 우리가 탄 배의 표적 좌표를 알려주고 맞짱 뜨자는 것과 다름없다. 심상정은 진보의 탄성을 잃었다. 진보란 용수철처럼 보수의 허점을 치고 튀어 오르는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 탄성을 가질 수 없다면 용수철을 바꿔야 한다.

대통령 후보들의 지역발전 공약은 이제 그만하자. 대통령은 지방의 목민관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이끄는 선장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자. 손이 따듯하다고, 발도 함께 따듯해지지는 않는다. 몸 전체에 온기가 흐르도록 해야 한다. 모든 세포가 한 생명체의 구성요소다. 지역의 균등한 발전이란 유기체의 기초체력이다.

바로 지금이 대한민국이 안전한 미래를 위해 백신을 맞을 적기다. 모든 예상 가능한 이물질에 대한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 정책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가능한 시나리오를 쓰고,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 예상 변이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이라면 각 후보 진영에서 유권자에게 시나리오와 백신 개발자 이름을 밝히는 것이 도리다. 유권자는 백신의 효능을 검토할 권리를 지닌다. 빈 주사기를 꽂지 마라.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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