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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왕관(王冠)장벽 에커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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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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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29] 에커계곡댐(Eckertalsperre)으로 향하는 마음은 소풍 가듯 들떴다. 시간적으로 현지 사정으로 몇 번이나 좌절을 겪은 터에 독일 쪽에서 특별 안내까지 준비해준 그곳에 잊을 수 없는 감회와 추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발의 초로(初老) 신사가 댐 입구까지 내려와 환한 얼굴로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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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커댐과 저수지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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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독일 하르츠(Harz) 지역에 위치한 에커계곡에 높이 60m 댐이 들어섰다. 1940~42년 나치 시기다. 계곡은 서쪽의 당시 프로이센 하노버(현 니더작센주), 동쪽의 작센과 경계를 이루었다. 서쪽 인근에 독일 국민차 '폭스바겐(Volkswagen)' 본거지인 볼프스부르크(Wolfsburg)가 있다.

중부지역의 가장 높은 산이자 다음 행선지인 브로켄산(Brocken)에서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석회성분이 적은 연수(軟水)로 질이 매우 좋다. 댐에 수백만 t의 물이 차자 볼프스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 시민들의 식수로는 물론이고, 자동차 생산을 위한 공업용수로 사용되었다. 수력발전으로 소규모 전력도 생산되었다. 전쟁 후 독일이 분단되고 동서독이 생겼어도 니더작센주와 작센주 경계선이 된 댐과 물의 사용에 어려움은 없었다.

1961년 동독이 베를린장벽 건설과 더불어 동서독 전 접경선을 완전히 닫아걸자 문제가 불거졌다. 에커 계곡도, 댐도 분단되었고, 물도 자본주의 물과 사회주의 물로 분리될 처지에 놓였다.

댐 건설 이후 서쪽의 (주)하르츠상수도(Harzwasserwerke)가 동쪽에 위치한 4.4㎞ 길이의 송수관을 통해 물을 공급받아 식수, 용수, 발전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접경선이 닫히면서 동독이 언제든지 송수관을 잠글 수 있었다. 동독 쪽의 댐과 저수호수 관리와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이 나타났다.

1972년 동서독은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접경위원회(Grenzkommission)'를 공동으로 구성했다. 임무는 접경선 재획정, 접경선 관련 문제들의 확인 및 해결 규정 마련이었다. 그 가운데 '물관리(Wasserwirtschaft)'가 포함되었고, 접경위원회는 에커댐 문제 해결에도 착수했다.

댐과 저수호수의 어디를 경계선으로 할지에 관해 이견이 일어나면서 수자원 이용에 큰 제한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댐의 물을 오로지 서독만이 사용하던 상황에서 동독이 부담해야 할 물의 양과 질 관리, 물 공급 그리고 물 공급에 대한 서독의 대가 지불 등 쟁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산통 끝에 1978년 동서독은 접경위원회 합의문에 공식 서명할 수 있었고, 에커댐 문제도 해결되었다. 동독은 자국을 지나는 송수관을 통한 물 공급의 안전을 보장하였고, 수질 관리도 담당하였다. 다만 서독 인력이 동독을 출입할 수는 없었고, 필요시 동독에 조치를 상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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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동서독 접경위원회가 경계선 획정에 합의한 에커 저수호수 지도, 위가 서독이고 아래가 동독이다. 호수의 중앙선(푸른점이 있는 선)을 경계로 하다보니 댐의 경우 서독이 거의 2/3를 차지했다(우측 상부).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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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커 저수호수 경계선, 좌측이 서독이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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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호수와 댐 경계선을 합의하자 동독은 댐 상부 통로에 장벽을 쌓았다. '장벽 위의 장벽(Mauer auf Mauer)'이 된 벽돌벽 주변에 동독은 사람이 오가지 못하도록 철심을 삐쭉삐쭉 박았다. '왕관장벽(Mauerkrone)'이라 불렸다. 그 2m 뒤엔 국경표식지주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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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장벽, 그 뒤로 동독 국경표식지주가 서 있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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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아래 내부 기계실도 분단되어야 했다. 동독은 흰색 페인트로 국경선을 표시하고 'DDR'(동독)를 썼다. 저수호수 동독 쪽에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통제지역이 설치되고 철조망, 지뢰, 차량방벽, 콘크리트 감시탑이 세워졌다. 왕관장벽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1980년 동독은 철제벽으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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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아래 기계실에 동독이 국경선을 페인트로 표시했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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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왕관장벽이 철제벽으로 바뀌었다. 뒤쪽이 동독이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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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엄중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1989년 분단이 끝날 때까지 에커댐에서 단 한 번도 물 공급이 중단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독이 동독에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이나, 성공적인 협력 사례다.

임진강과 북한강이란 남북 공유하천이 존재하고, 협력 부재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벼르고 찾은 이유이다.

로타 엥그러 씨, 바로 에커댐 위 통로에서 서독 연방접경수비대의 일원으로 복무했던 그가 이 역사를 체험과 함께 안내했다. 그는 근무 당시 왕관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독 수비대원과 '안녕' 인사 외에 대화는 불가능했다고, 동쪽에서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철제벽으로 바뀌었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댐 아래 기계실에서 기술적 요구에 의해 DDR선을 넘어간 적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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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그러 씨가 분단 시기 장벽이 있었던 자리, 40여 년 전 자신의 근무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장벽 바로 뒤에 있었던 검정·빨강·노랑의 동독 국경표식지주는 철제벽으로 교체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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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엥그러 씨가 댐 위에서 복무할 당시의 사진으로 뒤에 왕관장벽이 보인다. / 사진=로타 엥그러


엥그러 씨는 통일 이후 이곳을 찾는 이들을 안내하고 댐 일대를 보호하는 '레인저(Ranger)' 협회를 만들었다. 총부리를 맞대었던 옛 동독국경수비대원 출신도 함께한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철책과 에커댐 장벽에서 군 복무를 했던 두 사람이 분단과 통일에 관해 쉴 새 없이 나눈 사이 세 시간이 지나갔다. 왕관장벽이 철제벽으로 바뀌는 1979~1980년 시기에 근무한 엥그러 씨는 왕관장벽 제거 시에 동독군에 부탁하여 철심을 하나 건네받았다. 그가 그것을 더 이상 자신이 소장할 의미가 없음을 방금 깨달았다며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 다시 찾을 이유가 굳어졌다.

아쉬움을 포옹으로 달래고 돌아서는 한 사람은 아직 분단인이고, 여유 있게 손을 흔드는 사람은 통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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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근무는 같았으나 이제는 통일인과 분단인으로 갈라졌다.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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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
베를린장벽 붕괴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원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통일연구원에 봉직했으며 지금은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 한국DMZ학회장, 한독통일포럼 공동대표, 중국 톈진 외대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통일: 쟁점과 과제 1, 2' '30년 독일통일의 순례: 동서독 접경 1393㎞, 그뤼네스 반트를 종주하다' '통일, 가지 않은 길로 가야만 하는 길' '통일, 온 길 갈 길'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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