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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집안일에 지쳐 떠난 엄마, 남은 가족은 돼지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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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집안일은 피곳 부인에게 맡기고 쉬기만 하는 가족들은 부인이 떠나고 돼지가 된다. 1986년 영국, 2001년 한국에서 나온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다. 20년동안 한국에서 100만부가 판매됐다. [사진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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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들 둘이 가족인 피곳 부인의 하루는 늘 똑같다. 아침 식사 준비, 설거지, 침대 정리, 바닥 청소 후 직장으로 출근한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차린 뒤 설거지, 빨래, 다림질을 하고, 먹을 것을 조금 더 만든다. 남편과 아이들의 하루도 똑같다. 피곳 부인에게 아침밥을 채근해 먹고, 각각 회사와 학교에 다녀와 저녁밥을 받아먹고 TV를 본다.

어느 날 피곳 부인이 사라졌다.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쪽지를 남기고. 남은 가족은 실제 돼지로, 집안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게 변한다. 무릎 꿇고 비는 세 돼지 앞으로 피곳 부인은 되돌아온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가족은 집안일을 나눠 맡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피곳 부인이 자동차를 수리하는 장면이다. 그는 다시 떠나려는 걸까? 결말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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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은 피곳 부인에게 맡기고 쉬기만 하는 가족들은 부인이 떠나고 돼지가 된다. 1986년 영국, 2001년 한국에서 나온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다. 20년동안 한국에서 100만부가 판매됐다. [사진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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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중한 노동을 떠안은 여성, 그에게 일을 시키는 ‘돼지 같은’ 가족 구성원. 이 직설적이고 급진적인 발상은 1986년 나왔다. 영국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75)의 『돼지책』(Piggy Book)이다. 브라운은 1976년 『거울 속으로』읕 통해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고, 『고릴라』『겁쟁이 빌리』『우리 아빠』 등 50여 종의 그림책을 냈다. 그의 작품은 26개 언어로 번역됐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릴라와 코끼리, 곰, 꼬마 아이 등이 주인공이다. 아이들 마음과 가족의 사랑 등을 주로 다룬다.

『돼지책』은 선명한 문제의식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국내 출간은 2001년. 엄마가 좋아하는 그림책으로 자리 잡으면서 지금까지 약 100만부(134쇄)가 팔렸다. 웅진주니어는 한국 출간 20주년 특별 에디션을 이달 발간했다. 작가 브라운은 중앙일보와 e메일 인터뷰에서 “한 가족을 모델로 이 책을 구상했는데, 그들은 책을 선물로 받고서도 자신들 이야기인지 눈치채지 못하더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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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앤서니 브라운. 그의 대표작 돼지책은 선명한 페미니즘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 요즘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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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 1986년 미국 서평지 ‘퍼블리셔 위클리’는 “주제가 지나치게 선명하다(too clear). 10년쯤 전의 이야기”라며 남성과 여성의 노동은 이미 평등해졌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그들도 이제는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듯하다”고 했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여성,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 구성원은 가까운 곳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또 “사실 우리 아버지는 피곳씨와 달랐다. 요리, 청소, 육아를 함께했다. 책 속 두 아들과 같았던 사람은 나와 형이었다”고 고백했다.

『돼지책』의 원래 분위기는 더 심각했다. 브라운은 “이 책 작업을 시작한 후 마음에 들지 않아 책상 서랍 속에 몇 달간 넣어뒀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몰랐다”고 했다. 지나친 진지함이 문제였다. 그의 말을 전하면 “돼지가 너무 현실적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야기는 지나치게 도덕적이었다. 유머가 필요했다”는 거다.

브라운은 피곳 부인이 떠나기 전, 그러니까 돼지 변신 이전의 집안 곳곳에 돼지 문양 벽지, 돼지처럼 보이는 수도꼭지 등을 그려 넣었다. 색상은 밝게 바꿨다. 만화 같은 스타일로 바꾼 뒤에야 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어른들은 책에서 남녀 갈등을 불안하게 보지만, 아이들은 (성별과 상관없이) 사람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내용은 페미니즘 소설에 가깝고, 그림은 동심에 들어맞는 동화가 된 과정이다.

브라운은 모든 작품에서 내용과 그림 사이의 ‘격차’를 중시한다. “글이 그림의 모든 것을 설명해선 안 된다. 읽는 사람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놔야 한다”는 말이다. 중절모 모양의 나무들(『공원에서』), 마녀 모양인 엄마의 그림자(『헨젤과 그레텔』), 돼지 모양 시계, 브로치(『돼지책』) 등은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돕는 단서다. 그는 이런 그림을 그려 넣고 직접 설명은 피한다. “한번은 『돼지책』 독일어판에서 피곳 부인이 차 시동을 걸고 떠나는 결말을 임의로 넣었다. 섬뜩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편집자는 그 후로 내 어떤 책도 출간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는 독자의 상상은 북돋우고 희망은 남겨놓는 결말을 고집한다.

브라운은 거의 매년 그림책 한 권씩을 출간한다. “이야기가 내게 찾아온다. 내가 의식하고 결정할 새도 없이 그 이야기가 분위기를 정한다. 한 권 쓰는 데 보통 9개월 걸린다.” 다음 책은 개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아이 이야기다. “제목은 ‘소년, 그의 개와 바다’다. 자신을 둘러싼 평범한 세상을 들여다보며 사실은 그 세상이 놀랍다는 걸 발견하는 소년의 이야기”라고 했다.

여전히 브라운은 매일 규칙적으로 쓰고 그린다.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1시까지 일하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오후 내내 일한다. 하루 두 번은 강아지 앨버트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한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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