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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넷플릭스 '지옥'] '아기 지옥행'에, 동양종교는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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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이상국의 뷰 - 세상을 놀래킨 K드라마… 알고보면 더 놀라운 풍자와 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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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스릴러가 아닌 까닭

넷플릭스 영화 ‘지옥(Hellbound)'은 세계적인 화제를 부른 ’오징어게임‘에 이어 주목받고 있는 K-콘텐츠다. ’부산행‘을 만든 연상호 감독의 6부작 작품으로 최규석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거구의 몬스터(사실은 신의 사자(使者))가 대낮의 도시에 등장해 잔혹한 살육을 벌이는 첫 장면은 얼핏 재난스릴러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 정도가 아니다.

재난스릴러는 대개 ’오락형 폭력‘이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피상적인 스토리 구조를 지닌다면, ’지옥‘은 낯설고 기이하며 음울한 주제로 파고들어 충격의 일격을 가한다. 충격은, ’폭력‘과 ’신(神)‘이 결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이야기의 얼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한 인간이,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 괴물체의 안면(顔面)으로부터 음산한 통고를 받는다. 몇날 몇시 몇분에 지옥에 갈 것이라는 메시지다. 형상을 지니고 나타난 이 존재는 메신저일 뿐 그 밖의 행동에 참여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그 통보를 받은 인간은, 정확하게 그 시각에 등장한 3인조 괴수들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 그 살육은 지옥의 맛보기를 인간세상에 공개하는 폭력과 형벌의 뉘앙스를 띤다. 육체에 가하는 무지막지한 폭력에 이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잔혹한 화형(火刑)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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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 당하면 반드시 시연

영화에서 사람들은, 지옥행을 통고하는 메신저의 행위를 ’고지(告知)‘라고 불렀고 지옥행 고통의 샘플을 보여주며 죽음을 집행하는 몬스터 집행자의 행위를 ’시연(示演, 혹은 試演)‘이라고 불렀다. 示演(시연)이라면, 신이 인간에게 지옥행을 보여주는 프리젠테이션이고, 試演(시연)이라면 행동과정을 시험삼아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쇼‘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영화를 가만히 보면 신이 하는 살육집행 자체를 시연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지옥행 TV쇼‘로 대중에게 방영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示演을 슬그머니 試演으로 둔갑시킨 셈이다. 인간 중에 누군가는 이 ’시연‘으로 흥행몰이를 하고 장사를 한다.

6부작이 진행되는 동안, 고지를 받은 등장인물들이, 어김없이 시연을 당하는 ’연결고리‘를 확인시켜줌으로써 고지와 시연 사이에 필연성이 느껴지도록 해놓았다. 고지 받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지옥에 간다. 이 필연성의 확인은, ’신‘으로 지칭되는 절대존재의 강력한 의지가 끼어들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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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가 고지를 받았는가

도입부에 등장한 가장 인상적인 ’시연자‘는 박정자(배우 김신록)다. 떡볶이 장사를 하며 씨가 다른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여성이다. 그녀는 생일을 맞은 그날 장사를 일찍 접고 집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차려준 생일케이크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 신의 고지를 받는다. 그의 죽음은 30억의 중계료를 받고 공개시연된다. 지옥행과 돈의 거래. 의미심장한 풍자다. 이 방송으로, 사람들은 지옥에 대한 극심한 패닉에 빠진다.

이후 영화는, 뜻밖의 인물에게 닥쳐온 고지와 어김없는 시연 사이를 셔틀처럼 오가면서 압도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지옥행의 시연자들이 늘어날수록, 이 지상이 바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화한다. 드라마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가장 의외의 인간에게 부여된 고지와 그것의 시연을 둘러싼 긴장이다.

고지와 시연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동안, 그 사태에 대한 인간의 반응들은 복잡한 파문(波紋)을 만들어내며 영화 속의 공간을 난장판으로 이끈다. 그 스스로도 ’고지 받은 자‘라고 고백한, 신흥종교 단체 새진리회 의장 정진수(유아인 연기)는 20년전에 이미 지옥행을 통보받았다. 그는 천주교 보육원에서 성장했고 스무살 때 그곳을 탈출하여 티베트 여행을 간다. 거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고지와 시연의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신(神)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다가 종교단체를 창시한다. 그것이 '신의 시연'을 증언하는 새진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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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을 업은, 신흥종교와 광신도의 폭력

정진수는 설교에서 고지와 시연을 꾸준히 증언해왔지만 주목받지 못하다가, 백주에 발생한 ’시연‘사건 이후로 일약 종교계의 스타가 된다. 그러나 그 역시 '시연'으로 사라지고 만다. 정진수가 죽은 이후, 2대의장은 김정칠(이동희 연기)이 이어 받는다. 새진리회는 ’천벌(天罰)이 실현되는(실현되는 것으로 보여지는) 시대에 급조된 종교적 사생아‘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도에 대한 대중의 무지(無知)와 불안을 활용해 교세(敎勢)를 확장하고 세속의 이익을 증진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전형성을 지닌다.

여기에 기생하고 편승하는 ’화살촉‘은, 광신도 폭력집단이 어떻게 현대화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일련의 시연 사건으로 공권력은 무력화되고, 화살촉이 공안(公安)을 대리하면서 세상은 무법천지가 된다. 화살촉 리더 이동욱(김도윤 연기)은 온라인 개인방송 플랫폼을 이용해, 광신을 확산하는 전위로 활약한다. 그는 사건이 생겨나면 기자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도를 선점하는 ’사이버 렉카(사고차 견인에 달려가는 렉카차같은 잽싼 이슈화를 풍자한 말)‘다.

그는 방송에서 이렇게 외친다. “신이 활시위를 당기면 우리는 날아가야지요! 화살촉, 화살촉, 화살초오오옥!!” 한국의 영화가 이런 대목을 가장 생생하게 실연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각종 현실정치의 전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면 날아가는‘ 집단의 광기가 익숙할 만큼 자주 노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이동욱조차도 고지와 시연의 궤도 속으로 몰아넣는다. 신의 분노를 경고하는 역할을 맡은 그가 지옥행에 낙점된 건 또 무슨 뜻인가.

▶ 악에 대한 신의 인내는 더 이상 없다

영화 ’지옥‘이 폭발적으로 글로벌한 흥미와 관심 속에 놓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CG저승사자나 살육의 중계방송, 혹은 정진수와 같은 사이비교주의 흡인력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신의 뜻(의도)‘이란 말로 압축되는 단도직입적인 종교적 질문이 현대인들의 어떤 내면을 건드렸기 때문일 수 있다. 새진리회와, 비밀단체 소도의 장(長)인 변호사 민혜진(김현주 연기)의 격렬한 싸움은 ’신의 뜻‘을 호도하는 사이비집단과의 전투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은 말한다.

“신의 초월적 메시지는 인간역사 전반에 걸쳐 존재해왔다. 왜 지금이냐가 아니라, 왜 그걸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나 이다. 법망을 피해가는 죄인에 대해 더 이상 신의 인내는 없다. 즉결심판, 지옥의 선험을 시연해 보여주는 건 그 뜻이다.”

▶ 신의 응징은 틀릴 수 없다

새진리회는 신(神)이 만연한 악을 경계하기 위해 악을 철저히 응징하는 시연을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영화는 고지를 받은 대상들이 과연 지옥에 갈만한 악(惡)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확신할 만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신이 죽였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죽음에 상응하는 악을 저질렀을 거라는 혐의를 강조할 뿐이다.

새진리회가 취한 이런 태도는, 사실상 현실 종교계에서 취하는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신은 무오류라는 확신, 그렇기에 신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독실한 신앙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지-시연의 저 디스토피아에서는 신의 의도에 대해 절대복종하자는 목소리를 내는 저 종교집단과 선동단체가 악마적인 사이비로 그려진다. 이 어긋난 인식이, 기묘하게 현실종교와의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풍자적 의미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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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응징은 틀릴 수 있다

영화는 고지와 시연 사이의 ’합리적 연결성‘이 모호한 가운데, 인간이 억지로 그것을 연결하려고 강제하는 광기의 군상을 보여준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였는데, 마지막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고지 대상‘ 앞에서 인간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고지를 받았다. 그가 지옥에 가야할 만한 죄를 지을 시간이라도 있었던가. 아무리 따져봐도 그 ’죄‘를 찾아낼 수 없는 대상은, 신의 뜻이라고만 생각했던 모든 추론들을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신의 고지는 '필연의 고지'가 아니라 '랜덤 고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고지도, 고지받은 자의 '지옥행 죄악'을 증거할 수 없다. 신의 응징이 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새진리회 정진수 의장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 한 말은, 단호했던 평소의 주장과는 달리 내면에 돋아올라와 있던 깊은 의심을 잘 정리해놓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불행한 삶이었고, 그래서 삶에 대한 그 어떤 애착도 없었고, 살면서 어떤 악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고지가 내려왔을까요.”

▶ 이 영화는, 신정론(神正論)에 대한 도전인가

영화 ’지옥‘이 비록, 괴물 저승사자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인간 광기를 동원하여 영화를 끌어가고 있지만, 집요하게 제기하는 주제는 뜻밖에 신학의 근본적인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를 신학에서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 신은 언제나 옳다는 이론)이라고 부른다. 신정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나 고통의 문제에 대해, 신의 옳고 선함을 입증하려는 이론이다.

신이 전능하면서 선하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나 악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답이, 신정론이라 할 수 있다. 신에게 악을 막을 능력(전능함)과 의지(선함)가 있다면 왜 신은 인간의 악을 허용하는가를 묻는다. 이 이론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신정론(Theodizee, 1710년)‘에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질문을 설정한 뒤 여전히 신은 옳으며 항상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라이프니츠 이전에도 '신이 왜 악을 그대로 두는가'에 대한 집요하고 진지한 질문이 있어왔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신이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면, 신이 약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신에게 맞지 않다. 신이 능력은 있는데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신이 악의적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신과는 거리가 멀다. 신이 악을 극복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다면 신은 약하고 악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신이 아니다. 신에게 합당한 대로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며, 할 수도 있다고 하면, 어디에서 악이 오는 것이며 왜 신은 그것을 없애지 않는 것인가.” (이 말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글을 옮긴 것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지만, 고대에 이런 의견이 제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 '지옥'에서 거론되는 신 또한 모순을 피하기 어렵다. 신은 왜 '악인'을 골라 고지하는가. 그에게 악을 넣어준 존재는 누구인가. 신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모두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를 넣어준 결과라고 해도, 전능한 신은 왜 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넣어 인간을 고통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악인을 지옥에 보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 공포로 '악'을 줄이거나 제어할 수 있다는 새진리회의 주장은, 선한 존재인 신이 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 아기의 지옥행을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행은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이자 타락한 자의 생각을 되돌리는 생각이라는 기독교적인 신정론이, 화살촉이 개인방송에서 외치는 바로 주장의 핵심이라는 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신학적인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악은, 지은 죄가 없거나 선한 사람이 무고하게 당하는 고통이다. 영화 '지옥'은 신의 징벌이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신의 징벌이 현실에서 구체화될 때, 오히려 '신은 항상 옳다'는 논리는 시험에 들 수 밖에 없다. 죄와 벌의 상당성(相當性, 상호 연관성)이 납득되지 않을 때, 신은 즉각 반문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동양에서는 '전생(前生)'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죄없는 징벌'에 대한 방어장치를 만들어놓고 있다. 즉, 아기가 태어나자 마자 지옥에 가도록 되어 있는 것은, 신의 단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전생의 업(業)이 이미 쌓여있기에 그것이 고려되고 작동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전생의 '업'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지만, 한 생의 기억 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은 자기 밖에 있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불교적 관점에서, 튼튼이의 지옥행은 '신의 실패'가 아니라, 아기가 스스로 쌓은 과거의 업이 작동하는 결과일 뿐이라고 해명된다. 아기 뿐 아니라, 그 모든 '억울한 지옥행'도, 감히 이승에서의 죄과로만 따질 수 없는 복합적 견적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신정론'의 경우만 살핀다면, 생의 윤회를 설정한 동양의 사상이 훨씬 신(神)의 입지를 융통성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이 굳이 기대수명보다 일찍 데려가서 혼쭐내는 지옥이 아니더라도, 지옥행 대상자를 지목하고 시연하는 신의 과도한 부지런만으로도 이 영화는 이미,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어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지옥같이 우중충한 건물에서 살아가며, 지옥행을 고지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언제 고지가 날아올지 모르는 판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조마조마함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지받은 이웃의 소신(燒身)을 바라보며 살아있는 자기에 안도하는 풍경은, 고통 속에 죽어버린 사람보다 처지가 나은가. 악(惡)이 소독되고 제거되고 마침내 선(善)만이 남게되는 그런 천국이 거기에 생겨날 것 같은가.

▶ 홀로코스트 이후에, 악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

또다른 심각한 질문들도 남는다. 도대체 악은 무엇인가. 악은 따로 있는 것인가. 악은 몸의 문제인가 영혼의 문제인가. 영혼을 응징하는 방법이 육체에 고통을 주는 것인가. 신이 꾸준히 인간을 지옥에 보내도 악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대체 왜 거기에 그토록 많은 인간을 수용하는가. 그 많은 악들이 이미 지옥을 꽉 채우지는 않았는가.

인류 역사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악몽은 악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바꿨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인간은, 거대한 악이 아니라 사소해보이는 악들이었다. 그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채택한 일련의 결정들이 인류 최대의 악을 빚어냈다. 이 악이 빚어지는 동안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 신이 홀로코스트를 방치한 것일까. 악은 다만 선의 결여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은 선만을 창조했을 뿐이고, 아우슈비츠에는 선이 결여한 것이라고 신정론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하고 전능한 신이 왜 선의 결여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신의 존재 기반을 허물 정도로 끈질기다.

이런 모순들이 생겨나는 까닭은, 선악(善惡)이라는 인간의 도덕적 규범을 신에게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 만든 오류일지도 모른다. 신은 악함도 없지만 선함도 없다. 인간의 악함과 선함을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간과 같은 판단가치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신을, 인간 차원의 '선악의 늪'에서 빼내는 것이 진정한 '신정(神正)'을 회복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한국의 큰 사상가인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일갈이 떠오른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결코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천국에 갈 수도 없다.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신의 DNA'인 '얼'만이 신에게 귀일(歸一)하여 영생할 뿐이다. 영화가 보여준 저 '지옥행'의 소란은, 몸뚱이에 대한 집착이 낳은 공포와 신이 나쁜 몸뚱이를 응징할 거라는 잘못된 믿음이 빚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고유의 '가치 체계'인 선악을 주었지만, 선악 심판에 개입하여 주재자를 자임할 이유가 없다. 신은 절대선(絶對善)이기에 상대적 가치세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역설한 것이 류영모였다. 인간이 선해야 하는 까닭은,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스스로의 필요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이상국 논설실장 isomis@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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