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모셔진 국보 반가사유상 2점
높이 81.5·90.8㎝, 무게 37.6·112.2㎏…제작 시기·형태도 달라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반가사유상 공개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달 12일 공개한 '사유의 방'이 조용히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사유의 방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두 점만 전시한 파격적 공간이다. 우주를 품은 듯한 드넓은 전시실에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두 반가사유상이 오묘하고 신비로운 미소를 띤 채 관람객을 맞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사유의 방 개관 이후 지난 2일까지 상설전시관 입장객이 6만7천여 명이었으며, 약 4만5천 명이 사유의 방을 찾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5일 밝혔다. 관람객 3명 중 2명은 사유의 방에 들른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특히 외국인들의 관심이 크다"며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유의 방을 조회한 횟수를 보면 영문이 70%를 넘는다"고 말했다.
두 국보 반가사유상은 설명이 필요 없는 '명품'이지만, 유물에 얽힌 이야기는 무척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그동안 발간한 자료집과 전시 도록 등을 바탕으로 사유의 방에 들르기 전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정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공개된 두 국보 반가사유상 |
◇ 반가사유상은 무엇일까…두 국보 반가사유상이 특별한 이유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조각상이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빠진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이름이다.
처음 제작된 곳은 인도 간다라 지방이지만, 한국과 일본에서 특히 유행했다. 양국에서는 고대에 작은 반가사유상이 유독 많이 만들어졌다.
신소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반가부좌 자세는 수행과 번민이 교차하는 찰나를 보여준다"며 "반가사유상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상의 정체성에 대한 유일한 실마리는 '사유'라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국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가운데 국보는 3점, 보물은 2점이다.
사유의 방을 차지한 주인공들 외에 나머지 국보 한 점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다. 이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17.5㎝이다. 보물 반가사유상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각각 28.6㎝, 11.1㎝다.
사유의 방에 전시된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모두 80㎝를 넘는다. 규모도 큰 편이지만, 조형미와 예술성 측면에서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6세기 후반 제작된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
◇ 두 반가사유상 높이·무게·형태 어떻게 다를까
문화재청이 지난달 19일 문화재 지정번호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면서 사유의 방에 있는 두 국보 반가사유상을 구분해 부를 방법이 사라졌다. 두 반가사유상은 지정 명칭과 소장처는 물론 국보 지정일도 1962년 12월 20일로 동일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본관 2789'와 '덕수 3312'라는 소장품 번호를 사용하지만, 문화재계에서는 여전히 국보 제78호와 제83호로 일컫는다.
사유의 방 입구에서 봤을 때 왼쪽에 있는 제78호와 오른쪽의 제83호는 높이가 비슷하지만, 무게는 큰 차이가 난다.
제78호 반가사유상은 높이가 81.5㎝이고, 무게는 37.6㎏이다. 제83호는 조금 더 커서 높이가 90.8㎝인데, 무게는 112.2㎏에 달한다. 제78호보다 3배가량 무겁다.
무게 차이는 두께에서 기인한다. 두 반가사유상의 바탕 금속은 유사하다. 제78호는 구리 91.4%·주석 6.4%이고, 제83호는 구리 94.9%·주석 4.1%로 조사됐다. 다만 하단부 두께는 제78호가 0.34∼2.13㎝이고, 제83호가 0.47∼4.52㎝로 나타났다.
소장 경위와 제작 시기, 형태도 다르다. 제78호는 조선총독부가 1912년 골동품 수집가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로부터 입수해 4천원을 보상한 뒤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제83호는 이왕가박물관이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에게 2천600원을 주고 구매했다.
제작 시기는 제78호가 6세기 후반, 제83호가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신 연구사는 "구전되는 단서 외에 반가사유상 두 점의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다"며 "7세기 전반 반가사유상(제83호)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7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제78호 제작지를 백제로 밝혔으나, 사유의 방 설명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삭제했다.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처로 보인다.
7세기 전반 제작된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
형태는 머리에 쓴 보관(寶冠)과 상반신을 보면 확연히 구분된다. 제78호가 화려하다면, 제83호는 단순하다. 제78호는 여러 요소를 결합해 정교하게 장식한 보관을 착용했고, 제83호는 반원 3개로만 이뤄진 보관을 썼다. 제83호는 두 줄의 목걸이를 제외하면 웃옷을 거의 입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고, 제78호는 옷인 천의(天衣)의 어깨 부분이 살짝 올라간 점이 특징이다.
박진우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은 "6세기 후반 반가사유상(제78호)은 가볍지만 돌출된 부분이 많아 옮길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7세기 전반 반가사유상(제83호)은 무거워서 여러 명이 같이 들어야 하는데, 표면이 미끄럽고 손으로 잡을 곳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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