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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병들어가는 시대, 가난의 포로들이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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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미국 중심으로 들여다본

21세기 위기의 시대

정치 실패 넘어서려면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밖에


한겨레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l 뿌리와이파리 l 2만원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이 지은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로 시작한다. 대공황 1년 뒤, 히틀러 집권 3년 전인 1930년에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위기란 지배계급들이 기반을 잃고 그들을 떠받치는 합의가 시들해지며, 대중에 대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장악력이 허물어지는 것. 공백의 특징은 불확실성.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짓눌린다.

1930년대 그람시의 시대진단이 21세기를 조망하고 묘사하는 데 유효할까? 지은이의 답은 ‘그렇다’이다. 질문과 답변 사이에 382쪽의 긴 논증이 들어 있다. 유럽 이야기를 주로 하고 미국 이야기를 덧붙인 모양새라 대개는 지루하고 일부는 흥미로운데(미국이 대세인지라 어쩔 수 없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여다보면, ‘아재개그’ 식으로 풀어가는 영국인 특유의 고집스런 기술이 나름 귀엽다.

맛 뵈기 개그. “(이 책은) 내가 쓴 몇몇 전작들에 비하면 무척 얇다.” 그가 말한 전작이란 <유럽문화사 Ⅰ~Ⅴ>(2790쪽), <불안한 승리, 자본주의의 세계사 1860~1914>(1088쪽), <사회주의 100년,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1, 2>(1792쪽). 이번 책이 382쪽에 불과하니 맞은 말이긴 한데, 쩝.

지금은 병든 시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럽인들은 전통적인 정치인들에 분노하면서 유럽연합에 회의적이거나 이민을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거나 아예 투표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비정치인에게 표를 던진다. 부동산과 방송(도널드 트럼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금융(에마뉘엘 마크롱), 코미디(베페 그릴로), 식품산업(체코 지도자 안드레이 바비시) 등의 최고경영자(CEO). “지금은 거인들에 대한 기억을 잃은 난쟁이들의 시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도 다르지 않다.

말을 바꾸면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는 유럽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곳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있다. 특별히 놀랍지도 않은 것이, 좌파정당들이 우파의 신자유주의 의제를 많이 받아들여 제 기능을 상실한 탓이다. 긴축정책을 받아들이고 임금이 정체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도록 방치했으며 30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할 규모로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수혜자들에게 과감하게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이제는 국제통화기금(IMF)조차 부유층에 대한 세금 인하가 생산성을 끌어내리고 불평등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겨레

지난 2020년 3월 이탈리아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동 제한령을 내린 가운데 북부도시 밀라노의 중앙역에서 군인들이 승객들의 여행을 통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유럽연합은 공동체를 지키기보다 각자도생하기에 바빴다. 21세기 대표적인 병적징후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백신을 독점하고 제조법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바이러스 변이 발생을 방조하며 인류를 더욱 큰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 밀라노/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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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표방하는 유럽연합. 알고 보면 지리멸렬, 각자도생이다. 굳이 ‘브렉시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코로나19에 대응한 연대는 없었다. 2020년 이탈리아에 바이러스가 번졌을 때 멀리 떨어진 중국이 달려온 데 반해 동료국가들은 외면했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 국경을 닫았다. 독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국경을 폐쇄했다. 유럽은 국제적인 주요 쟁점에 대해 단일한 입장도, 선도적 기획도, 단일한 해법도 없다. “유럽은 경제적으로는 거인이고, 정치적으로는 난쟁이이며, 국방 역량을 제대로 구축하기 전까지는 지렁이에 불과하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도널드 트럼프의 슬로건에는 이 나라가 더이상 위대하지 않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지은이는 묻는다. 미국이 위대했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한국, 베트남, 쿠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등의 군사개입은 재앙으로 귀결됐다. ‘위대’는 아니어도 ‘대’를 꼽자면 대중문화, 소프트웨어, 소셜미디어 정도.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려면 역사를 되짚어보고, ‘다시’라는 단어를 다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은이는 마키아벨리를 빌려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운(포르투나)이 좋거나 역량이나 기술을 갖춘 지도자(비르투)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나 정당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기대를 걸지 않는다. 예컨대, 미국인 80%가 체제를 불신한다. “트럼프 지지자는 연방정부를 불신했고, 반대자들은 트럼프가 백악관에 들어앉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기에 그렇다.”(트럼프 집권기에 집필한 탓에 망나니 얘기가 많이 나온다.)

현재의 정치는 실패로 치닫는 중이다. 정치인은 투표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한다. “유권자들은 투표하는 순간 자기의 권한과 목표와 바람을 믿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정치인한테 넘겨주는 셈이다. 투표는 권력을 포기하는 행위다. 투표 뒤 집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고양이한테 분풀이를 할 뿐이다.”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 현재 판도와 정황을 기술할 따름이다. 지은이는 정치인도 혁명가도 아닌 역사가 아닌가. 다만 서두에서 그람시 <옥중수고>의 맥락이 대공황 1년 뒤, 히틀러 집권 3년 전이라 한 게 지은이의 음울한 예언이려니 짐작한다.

‘인터내셔널가’로 책을 마감하는 게 인상적이다.

“일어나라 대지의 저주받은 이들이여/ 일어나라 가난의 포로들이여…/ 과거를 딛고 새롭게 시작하자/ 예속된 무리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낡은 세계는 사멸하리니…/ 이제 최후의 결전이다./ 우리가 다시 모이면, 내일은 인터내셔널이 인류가 되리니.”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장담은 못하지만 희망을 가지라고. 불가피하게 소수이겠지만 꿈을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가라고.

임종업 <뉴스토마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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