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비운의 조각가 예술혼, 사진으로 되살리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근대 조각의 거장 권진규 작가가 조각한 불상 뒤로 목정욱 작가가 찍은 권 작가의 예수상 사진작품이 걸려 있다. [사진 제공 = PKM갤러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물사진에는 뒷모습이 없다. 뒷모습은 정면으로부터 늘 은폐된다.

하지만 표정과 주름만으로도, 정면은 아득한 이야기를 건네곤 한다. 피사체의 뒷면을 보지 못하도록 설계된 두 눈 대신, 감춰진 이야기를 상상할 권능을 인간은 가졌기 때문이다.

근대 조각의 거장 권진규 작가(1922~1973)의 자소상과 패션 포토그래퍼 목정욱 작가(41)가 권 작가의 자소상을 찍은 사진을 한 공간에서 감상 가능한 전시가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린다. 권진규·목정욱의 '불멸의 초상' 전시를 기획한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내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목정욱 작가와 기획한 전시로, 권진규 작품이 근대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현대와 교감함을 발견하려는 취지"라고 말했다.

목 작가는 블랙핑크·아이유·엑소 등의 앨범 커버를 촬영했고, 최근 방탄소년단의 타임지 표지 사진을 촬영한 현시대 최고 수준의 패션 사진작가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전시장 정면에 예수상('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위태로운 자세로 걸려 있다.

생전의 권 작가가 한 교회 의뢰로 제작했지만 "초라하다"는 이유로 납품을 거절당했다고 알려진 바로 그 예수상이다. 목심(木心)으로 뼈를 세우고 옻나무즙(건칠·乾漆)을 바른 천을 둘둘 감싸 만든 예수상은 머리 위 바퀴 모양의 광배, 양 손바닥 중앙의 거대한 못머리가 아니라면 성상(聖像)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초라한 모습이다.

예수상은 목 작가의 카메라 안에서 재해석된다. 불충분한 조명 아래에서 찍힌 역광의 형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사진은 옻칠로 인한 울퉁불퉁한 표면의 예수를 거두고 형상이 말하는 의미와 본질로 관람객을 데려다 놓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진다는 건칠의 예수상과 벽면에 걸린 목 작가의 사진은 시간을 사유케 한다.

목정욱 작가는 "빛은 인물에 어떻게 닿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셔터를 누르기 전 가장 적합한 조면과 구도를 고민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어 "권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실견했을 때 조각의 눈빛이 여전히 살아있음에 놀랐다"고 소회하기도 했다.

사후 권진규는 '자소상의 작가'로 불렸다. 석고상과 테라코타로 자기의 현재 시간을 증식하듯 여러 점의 두상을 남겼다. 이번에 전시된 여섯 점의 자소상 중 반드시 봐야 할 작품은 전시장 정중앙에 놓인 '석고 자소상'이다. 생의 마지막 계단에서 병환 탓에 쇠약해진 작가 자신의 모습을 빚었는데 볼살이 죄다 빠져 퀭한 표정이 그대로다.

권진규 자소상을 사진으로 담은 목 작가 작품 중에는 카메라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해 마치 인물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주도록 찍은 작품이 다수다. 목 작가는 "예술 작품이 몇십 년 살아남아 제 눈앞에 당도했음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인 시간"이라며 "작품이 다가오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사후엔 천재성을 인정받았지만 생전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시대와 불화한 권진규의 작업장에는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작가로서 자존의 고민이 깊었고, 유서에는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고 적혀 있을 만큼 작품세계의 갱신 끝에 이른 고독과 '공 사상'은 여전히 회자된다.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자소상은 그가 작고한 1973년 이후 수많은 미술사가와 문인의 연구·창작의 대상이었다. 권진규를 직접적으로 다룬 학위 논문만 20개가 넘고, 들뢰즈와 무의식으로서의 얼굴, 종교성을 중심으로 본 성상 이미지 등으로 작품을 연구한 학자도 다수다. 1967년작 '지원의 얼굴'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 미술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박경미 대표는 "조각가가 남긴 작품의 밀도를 느끼면서도 사진작가가 읽어낸 조각가의 내면이 함께 포착되길 바란다"며 "이번 전시가 과거와 현재가 공명하는 교감의 장으로 읽히길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28일까지.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