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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몽골침략군 타격한 거대 ‘치성’이 고려 임시 수도 강화중성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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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m 길이로 돌출된 대형 방어시설…고려시대 치성 중 최대 규모

한겨레

고려시대 최대 규모의 치성 터가 드러난 강화중성 3차 발굴조사 현장. 사진 가운데와 왼쪽 부분 보이는 흙벽이 성벽의 본체이고, 오른쪽으로 뻗어가는 돌출된 흙벽 부분이 방어용 치성 터의 자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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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고려 왕조가 몽골 침략군과 30여년 동안 맞서 싸우면서 임시수도 강화도에 쌓은 성곽 ‘강화중성’에서 길이가 19m나 되는 초대형 방어 시설 ‘치성(雉城)’의 자취가 약 8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치성은 성벽 바깥 쪽에 툭 튀어나온 요철 모양으로 쌓은 옛 방어시설이다. 침입한 적군을 삼면에서 내려다보며 능동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강화중성 남쪽 성벽 구간인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산 8번지의 대문고개 일대(면적 약 1천400㎡)에서 최근 발굴 조사를 벌여 길이 19m, 너비 4.5∼4.7m, 높이 1.3∼2.6m에 달하는 치성 터를 확인했다고 2일 발표했다. 조사 구역은 성문 자리로 추정해온 현재 대문고개 도로의 서쪽 능선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해발 89~91m의 야트막한 능선 정상부와 대문고개로 이어지는 동쪽 경사진 지대를 따라 성벽이 세워졌는데, 이에 잇대어 대규모 치성의 자취가 돌출된 양상을 보여준다. 강화섬에서 완전한 모양새의 대규모 치성 터가 나온 첫 사례다. 나라 안에 흩어진 고려시대 성곽의 치성 유적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란 점에서도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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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쪽에서 본 유적 현장을 찍은 사진이다. 바깥으로 돌출된 치성 터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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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성 3차 발굴조사 현황 설명도. 위에서 내려다본 발굴 현장 사진을 배경으로 만든 것이다. 성벽에서 뻗어 나온 치성의 자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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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성의 치성 터는 다른 치성 유적에 비해 유난히 길쭉한 모양새를 띤다는 점이 특징이다.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든 뒤 일정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판재를 엮어 만든 틀에 성질이 다른 흙을 여러 겹 다져 올리는 당대 일반적인 성벽 쌓기 기법을 썼다. 치성 터 주변에서는 다수의 기와 조각과 문을 고정하는 문확석(門確石), 건물 기둥을 받치는 초석(礎石) 등의 유물들도 출토됐다. 치성과 잇닿는 성벽은 너비와 높이가 치성과 비슷한 규모로 능선 꼭대기 부근을 따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휘어져 축조된 양상이다. 성벽 안쪽에는 돌로 쌓은 기단 보강 시설과 통행로가 성벽과 나란히 만들어졌다. 성벽과 치성에 오를 수 있게 만든 계단 모양의 등성(登城) 시설 자취도 확인됐다.

연구소 쪽은 “치성 터는 강화를 지키기 위해 쌓은 중성에서 처음 확인된 대규모의 성곽 구조물로, 도성 내·외부를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며 성문 방어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남한 내 유일한 고려도성인 강화도성의 성곽 구조와 방어 전략 운영 등을 짐작할 근거를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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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중성 3차 발굴조사 구역을 멀리서 찍은 원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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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다본 치성 터의 옆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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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쪽에서 치성과 성벽으로 올라가는 등성 시설 터 모습. 계단 발판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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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과 조정은 몽골군의 침략이 거듭되자 1232년 강화섬으로 도읍을 옮기고 1270년까지 웅거하며 항쟁했다. 이 기간을 학계에서는 ‘강도(江都) 시기’라고 일컫는데, 강화중성은 강도시기에 세운 3개의 성곽(내성·중성·외성)들 가운데 하나다. ‘⊂’의 모양으로 임시 수도 강화를 둘러싼 토성(土城)으로, 현재까지 11.39㎞의 성벽 구간이 밝혀졌다. 강도시기에 쌓은 강화의 성곽들 가운데 당시의 모습이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고려사> 등의 사서 기록을 보면 중성은 1250년(고종 37년)에 축조됐고, 둘레가 2960칸에 17개의 크고 작은 성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1259년에 몽골과 화의를 맺으면서 성곽을 허문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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