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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김한수의 오마이갓] 김대건 성인의 유해는 200곳 이상에 분할 안치됐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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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보내지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 일부. 성광 안에 안치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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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한국인 신부 김대건 성인 유해, 부르키나파소에 안치되다.’

지난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발표한 보도자료의 제목입니다. 염수정 추기경이 아프리카 대륙 부르키나파소라는 나라의 성 요셉 성당에 성(聖)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를 보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보도자료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성광(聖光) 안에 모셔진 사진도 있었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유해는 부르키나파소의 성 요셉 성당 제대에 안치될 예정입니다. 성 요셉 성당은 서울 여의도동성당 신자들의 지원으로 새롭게 지어졌다고 합니다. 부르키나파소 측에서는 올해 성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禧年)을 맞아 유해의 일부를 봉안하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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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3일 염수정 추기경(왼쪽)이 부르키나파소 줄리앙 까보레 몬시뇰에게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담긴 성광을 전달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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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보면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김대건 성인은 새남터에서 순교한 이후 신자들에 의해 유해가 경기 안성 현재의 미리내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지 않았나’하는 것이었지요. 역사책이나 백과사전 등에 나오는 내용은 대개 여기서 끝나지요. 알아보니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처음 미리내 성지에 안장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미 1969년부터 1996년 사이에만 국내 성당과 개인, 단체 등 200여곳에 분배됐다고 하네요. 좀더 많은 곳에 분배됐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파악 중이라고 합니다. 미리내성지 한 곳에 김대건 성인의 유해 전체가 안장된 것이 아니라 전국에 두루 나뉘어졌다는 뜻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이렇게 나뉘어지게 된 것은 천주교의 ‘성인 유해 공경’ 전통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님은 “박해 시대부터 순교한 성인들의 유해를 공경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룩하고 성스럽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고,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졌듯이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성당을 세우는 것도 성인의 유해를 공경하는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사실 신자들 입장에선 앞서간 성인들의 유물, 유품, 유해를 구체적 실물로 봄으로써 성인들의 삶과 신앙, 영성을 닮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겠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자인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된 작은 주머니 여섯 개에는 순교자들의 머리카락과 나무조각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딸에게 물으니 “연전(年前)에 순교한 사람의 머리카락과 처참시의 목침”이라고 말했답니다. 머리카락이나 목침 조각이라도 간직하고 공경하며 순교자의 삶을 기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인의 유해는 그 수가 유한하기 때문에 매우 귀했겠지요. 그래서 서기 7~8세기에는 성인의 유해를 분할 안치하는 것도 허용됐답니다. 중세 때에는 성인의 유해를 강탈, 절도, 매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지요. 가짜 유해도 등장했겠지요. 교회법도 정비됐답니다. 시복(諡福)·시성(諡聖)된 분에 한해 교구장이 유해의 진정성 즉 진위여부를 판단하도록 한 것이지요. 지난 9월 전북 완주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유해 발굴 후 과학적 검증 끝에 전주교구가 연 보고회의 명칭도 ‘유해 진정성에 관한 보고회’였습니다. 전주교구는 윤지충·권상연·윤지헌 복자의 유해를 안치하면서 일부는 성광에 담아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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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의 금강계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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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성인의 유해를 공경하는 전통은 불교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 공경을 연상하게 합니다. 진신사리란 부처님 열반 후 다비(화장)를 마치고 나온 구슬 같은 결정체를 일컫지요. 부처님 다비 후엔 모두 8말 8되의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인도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가고자 해서 전쟁이 벌어질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하지요. 결국 여덟 나라에 배분해 탑(근본팔탑)을 세우고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고 합니다. 훗날 불교 중흥을 이끌어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린 아쇼카 대왕이 탑을 해체한 후 부처님 사리를 8만 4000개로 나눠 인도 전역에 수많은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고 합니다. ‘8말 8되’ ‘8만 4000개’는 ‘무수히 많다’는 표현이겠지요. 이 사리들은 인도뿐 아니라 스리랑카,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습니다. 현재 국내에는 영축산 통도사(양산), 오대산 상원사(평창),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영월) 등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사리도 전세계 불교국가로 분할 안치됐지요. 부처님이나 큰스님들의 사리가 일반적으로 탑 안에 봉안되는 것과 달리 천주교 성인들의 유해는 성광에 담겨 신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차이이겠지요.

다시 김대건 성인 이야기로 돌아가보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애초 김대건 성인의 유해는 미리내 성지에 안치됐습니다. 1901년 뮈텔 주교의 명을 받은 드망즈 신부가 김대건 성인의 묘를 발굴해 유해를 모두 추려 용산신학교로 옮겨 이듬해 신학교 성당 제대 밑에 안치했답니다. 이후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도 피란을 다녔다고 합니다. 서울대교구는 1996년까지 김대건 성인의 유해 관리를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위탁했답니다. 명동대성당 바로 뒤에 위치한 수녀원입니다. 수녀원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96년까지 200여점의 유해가 교구장의 허락 하에 성당과 단체, 개인에게 나뉘어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김대건 성인이 첫 한국인 천주교 사제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1996년 이후로는 서울대교구 사무처가 관리를 이관받았습니다. 1996년 당시 김대건 성인의 유해 관리 업무를 수녀원으로부터 이관받은 분은 30일 이임 감사미사를 갖고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한 염수정 추기경(당시 사무처장 신부)이었습니다. 분배되고 남은 김대건 성인의 유해는 가톨릭대 성신교정(혜화동신학교)에 현재 보관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신임 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가 임명 다음날인 지난 10월 29일 가톨릭대 성신교정을 찾아 기도한 곳도 김대건 성인의 유해 앞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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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정순택 대주교가 임명 다음날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을 찾아 김대건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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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천주교에서 복자와 성인은 공경의 범위(권역)가 다릅니다. 복자는 공경의 범위가 지역과 교구입니다. 성인이 되면 공경의 범위가 전세계로 넓어지지요. 이번에 유해의 일부가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까지 건너가 분할 안치되는 것도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서울대교구는 현재 김대건 성인의 유해 보관 현황을 전수 조사하고 있습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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