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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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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가을, 20년 ‘프로산책러’ 부부의 추천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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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목적 없는 행동 중 가장 낭만적인 것은 산책이 아닐까. 숨어있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책길 34곳을 소개하는 책 <슬슬, 거닐다>를 펴낸 박여진 작가는 산책을 “목적이 없는 걷기”로 정의한다. “맛집을 찾아간다거나 유명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그냥 슬슬 거니는 것이 산책에 가까운 것 같다”고도 했다.

오래 걸어도 땀이 흐르지 않고 계절의 흐름을 분 단위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계절이 왔다. 무엇보다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이 반가운 때다. 20년 동안 한결같이 산책을 즐긴 번역가 아내와 사진가 남편의 산책 예찬. 그리고 익숙한 운동화만 있으면 나설 수 있는 길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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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진 작가가 가을에 걸으면 좋은 길로 추천한 경기 화성의 우음도.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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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낙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캠핑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텐트와 침낭, 간단한 취사도구를 챙겨 여행을 자주 갔어요.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곳으로 등산도 자주 갔고요. 그런데 목적지에 가는 도중 잠시 들른 시장 골목이나 마을, 유적지 주변을 걷는 게 무척 즐겁더라고요. 마음의 부담도 적고요. 그래서 어디든 갈 일이 생기면 주변 산책지를 찾아 걷게 되었어요.”

산책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그 길’은 어디였나요?

= “수많은 길이 있지만 정선의 ‘가수리마을’이 생각나요. 지인의 장례식에 가려고 들렀다가 장시간 운전이 피곤해서 잠시 쉬려고 마을 분교에 있는 평상으로 갔어요. 분교에는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노인분들이 도란도란 모여 화투를 치고 계셨어요. 어찌나 찰지고 재미나게 치시는지 푹 빠져서 소소한 참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어르신 한 분이 ‘이 짝에 좀 둔놔서 쉬어라’라고 하시면서 생수병 하나를 내미셨어요. 생수병을 베고 늙은 나무 아래서 낮잠이 들었죠.

자고 일어나니 어르신 한 분이 마을 구경도 하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몽롱한 기분으로 마을을 걷는데, 그때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어요. 낮곁이 길게 드리운 마을 길에 게으른 개들이 지나다니고, 강이 흐르고, 병풍 같은 산이 감싼 그 길.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어요.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조차 따뜻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어요. 그 생경하고도 아늑한 기분에 매료되어 한참을 거닐었고 이후로도 지인의 경조사나 다른 볼일이 있어 낯선 도시에 가게 되면 꼭 좋은 길을 찾아 걷게 되었어요.”

산책길을 찾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 “지자체 홈페이지를 많이 활용해요.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나 향교, 서원, 고찰을 찾아보곤 하죠. 그런 곳들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주변에는 강이나 숲이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성곽도 좋아해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라 곳곳에 성곽이 많이 있어요. 성곽의 특성상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많아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많거든요. 요즘은 걷기 정보가 정리된 인터넷 사이트들도 많아서 그런 사이트를 참고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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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정마을. 도심의 골목길에서도 산책의 낭만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코로나19를 겪는 동안 새삼 발견한 산책의 좋은 점이 있을까요?

=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여러 ‘관계’에 얽혀 살게 돼요. 상처가 생기는 관계도 있고, 의도와 달리 자꾸만 엉키는 관계도 있고, 실망이나 후회로 끝나는 관계도 있고요. 물론 좋은 관계도 있죠.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힘이 되는 그런 관계들. 그런데 산책은 혼자 걷든 둘이 걷든 오롯이 혼자 그 길을 통과해야 해요. 내 걸음에 집중하게 되고, 내 촉각이 느끼는 바람, 내 후각에 들어오는 숲 냄새, 내 청각에 들어오는 물소리며 새소리에 몰입하게 되죠. 일상의 삶은 좋건 싫건 어느 정도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는데 산책은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내 안에 쌓이는 그런 순간들이 무척 소중한 것 같아요.”

글을 읽다보면 작가님께서 텀블러에 커피를 담는 것부터가 산책의 시작 같습니다.

= “커피를 좋아해서 텀블러를 잊으면 다시 돌아와 커피를 챙겨갈 정도예요. 그 외에도 산책을 가기 전에는 ‘청소’를 해요. 산책의 최종 목적지인 집에 돌아왔을 때 지저분한 현실을 마주하면 산책의 여운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아서요. 되도록 산책이 ‘일상’의 영역과 나란하길 바라요. 특별한 이벤트로서의 산책 여행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연장이었으면 해요. 깊은 숲길을 걷거나 애틋한 노을을 보고 돌아왔을 때 집이 저만치 뚝 떨어진 곳에서 냉랭하게 저를 맞지 않았으면 해요. 그래서 매주 강제로라도 청소를 하게 되더라고요.

간식 가방도 꼭 챙겨요. 외진 길에는 식당이 많이 없어서 도중에 식사할 곳을 찾다 보면 산책의 흐름이 끊기거든요. 집에 있는 과일이나 고구마 등을 손질해서 텀블러 가방에 함께 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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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리 해안사구를 함께 걸은 박여진 작가의 조카는 모래언덕에 새겨진 바람의 자국을 “눈물 자국 같다”고 말했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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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의 힘

박여진 작가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2> 외 다수의 책을 작업한 번역가이다. 월간지에 산책 에세이도 기고한다. 박 작가가 ‘백’이라고 일컫는 남편 백홍기 작가는 월간지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사진을 추구하는 사진집단 ‘포토청’의 회장을 맡고 있는 사진가다. <토닥토닥, 숲길>에 이은 이번 에세이는 부부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박 작가가 산책길을 정하면, ‘길치’ 아내를 대신해 남편이 코스를 정한다.

부부는 초등학교 시절 짝꿍 출신(?)이다. 십대 때만 해도 데면데면 지나치다가 20~30대에 동네 오락실, 당구장, PC방, 맥주집 등에서 만나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연애 고민도 털어놓는 친구로 발전했다. 이후 동네에 생긴 근사한 바에서 데킬라를 마시다가 “우정의 경계”를 넘어 슬며시 손을 잡았다가 이후 “계속 손을 잡는 인연”이 됐다.

‘아주 오래된 연인’에게 산책은 어떤 역할을 해주고 있나요?

= “보통의 일상에 윤기를 더해주는 것 같아요. 주말에 산책 여행 계획이 있으면 한 주 내내 설레요. 다녀오고 나면 산책지 풍경이 어른거려 한 주가 풍성해지고요.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낯선 곳에서 낯선 감각을 느끼며 걷다 보면 시간이 길고 깊게 늘어나는 기분이에요. 같은 시간이라도 더 오래, 더 깊이 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요. 산책은 우리의 삶을 더 길고 깊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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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안반데기, 어흘리 소나무 숲 등 저자가 방문한 산책길의 여운이 가득한 에세이와 함께 세심하게 고른 34곳 산책길 관련 정보가 담겼다.


산책하면서 어떤 ‘발견’을 했나요?

= “시간의 농도요. 산책지를 통과한 시간들은 여느 시간보다 농도가 짙어요. 그 시간들이 가파르고 얇게 살아가는 일상을 채워준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가려고 벼르고 있는 길이 있다면요?

=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지방을 자주 가요. 올겨울에는 미륵도와 비진도, 연대도 등으로 이어지는 바다백리길을 걸을 계획이에요.”

‘산책을 산책답게, 잘 즐기려면’이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요?

= “문밖은 길이다. 일단 운동화를 신고 나가라. 어디든 걷다 보면 어디에든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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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소나무들이 바람처럼 굽어있다”고 소개한 경남 양산 통도사의 무풍한솔길.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프로산책러’ 박여진·백홍기 작가의 추천 산책길

▶가을에 걸으면 좋은 길

·화성 우음도

- “가을이면 마른 풀들이 아름다운 곳이에요.”

·창녕 고분터

- “거대한 고분군들 사이를 조용히 걷기 좋아요.”

▶겨울에 걸으면 좋은 길

·철원 한탄강 물윗길

- “언 강 위에 부표로 길이 만들어져 있어 출렁이는 강 위를 걸을 수 있어요. 겨울에만 문을 열어요.”

·포천 멍우리협곡

- “다른 계절에는 나무가 무성해 아름다운 절벽이 가려지는데, 겨울엔 빈 나무들 사이로 기암절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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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지장매가 환하게 핀 양산 통도사의 봄.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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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걸으면 좋은 길

·화순 둔동마을 숲정이길

- “버드나무에 연두색 순이 맺힐 때가 참 예뻐요.”

·통도사 무풍한솔길

- “구불구불한 소나무길을 지나 통도사에 도착하면 분홍 지장매가 환하게 피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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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머체왓숲길. 박여진 작가는 “비자림, 사려니숲, 곶자왈 등 제주의 숲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머체왓숲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여름에 걸으면 좋은 길

·제주 머체왓숲길

- “숲이 깊어서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요.”

·밀양 깐촌나루터

- “해질 무렵 나루터에서 노을을 보며 산책하기 좋아요.”

▶위안이 필요할 때 찾으면 좋은 길

·영월 산꼬라데이길 중 광부의 길

- “막장에서 삶을 캐고 또 캐냈을 광부들이 걷던 길이에요.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면 이 길을 자주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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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들과 천천히 걷기 좋은 정동길.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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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메이트와 끝없이 대화할 수 있는 길

·정동길

- “돌담을 따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근처 맛집이나 서점에 들르기 좋은 것 같아요.”

▶말없이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길

·화천 비수구미 가는 길

- “파로호로 흘러 들어가는 북한강을 곁에 두고 걷는 길이고, 강길과 숲길이 정말 아름다워요.”

·해품길

- “매물도를 한 바퀴 도는 길인데, 남쪽의 바다가 내내 펼쳐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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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돔배물에서 빌레못동굴 가는 길. 빌레못은 너른 바위가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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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알고 있는 숨겨진 길

·강원도 어흘리 숲길

- “2018년에 100년만에 개방된 소나무 숲이에요.”

·제주도 빌레못 동굴 가는 길

- “4.3의 아픔이 서린 곳인데, 찾는 이도 적고 입구도 워낙 작아 길을 놓치기 쉬워요.”

·남해 물건마을 어부림 길

- “해풍을 막고 어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숲 어부림이라고 해요. 바닷가 마을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의 숲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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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여진 작가가 조카와 함께 걸었던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어린이와 걸으면 더 좋은 길

·양구 박수근미술관

- “산책로 조성도 잘 되어 있고 미술관도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아요.”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 “걷다 보면 도마뱀처럼 생긴 장지뱀도 볼 수 있고 개미귀신이 구덩이를 파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다만 한여름에는 그늘이 없으니 다른 계절에 가는 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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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이 있는 서울 북정마을. 성곽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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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모르고 있는 길

·문경 고모산성

- “문경 하면 문경세재가 가장 유명한데, 고모산성 성곽길도 고즈넉하고 걷기 좋아요.”

·서울 북정마을 심우장 가는 길

- “만해 한용운의 거처였던 곳인데 구불거리는 골목길이 걷기 좋아요. 길 끝에 도착하면 한양도성길도 이어지고요. 그곳에 오래된 트럭카페가 있는데 전망이 무척 좋아요.”

·구례 화엄사에서 구층암 가는 길

- “보통 구례 화엄사만 보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대나무 숲을 지나면 구층암이 나와요. 오래된 매화나무로 세운 기둥이 근사한 암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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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의 매화마을. ‘매화’는 꽃이 아니라 ‘매 때문에 입은 화’를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비극이 서린 곳이다. 사진|백홍기 작가·마음의숲 제공


▶다크투어 산책길

·평창 매화마을

- “매화가 없는 매화마을. 그 마을 이름의 어원을 생각하며 걷기 좋은 길.”

·제주: 빌레못동굴 가는 길

▶저자의 추억이 담긴 각별한 길

·청산도 슬로길

- “최근 생일에 큰맘 먹고 연차까지 내서 갔는데, 사상 최악의 미세먼지가 오는 바람에 무척 아쉬웠어요. 아쉬움과 기대가 뒤섞인 여행이었지만 의외로 오래 여운이 남더라고요. 특히 떠나는 날 마지막 배를 타기 두어 시간 전 바닷가에서 썰물을 바라봤어요. 그때 그 바다가 남긴 흰 거품과 모래 자국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어요. 배낭에 걸려 떨어진 선인장 한 토막을 컵에 담아 가져왔는데 지금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요. 선인장에 ‘청산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어요.”

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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