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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노태우 별세] 시장 개방·자유화 門 연 대통령…재임기 평균 8.5%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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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의 경제 정책은 ‘자유화’와 ‘개방화’가 핵심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12월 5일 외환 및 금리자유화가 시행됐다. 금리자유화란 정부 및 금융당국이 금융기관의 금리에 대한 직접규제를 철폐하고 금리가 시장에서 자금수급 사정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될 수 있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이를 통해 금융시장 개방이 이뤄지면서 1988년 외국계 보험사 합작사 및 현지법인도 허용됐다. 또 ‘자본시장 국제화 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면서 1992년 1월에는 외국인이 한국 주식시장에 직접 투자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국내 주식 시장의 개방화에 한몫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경제도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누렸다. 특히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는 발전한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1988년 수출은 600억 달러를 돌파했고, 1986년 대한민국은 대외교역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한 뒤, 매년 확대되면서 1989년 한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올라섰다.

조선비즈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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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 소련·중국과 ‘국교’

노 대통령의 경제성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는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노 대통령은 취임 전인 1983년 서울 올림픽 임시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구성됐고,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 올림픽 개최를 이끌었다.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유치시켰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준비와 진행을 지원했다.

노 대통령은 개회식에 참석해 “서울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라며, 올림픽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북의 핵개발로 빛이 바랬지만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남북 단일 체육팀 출전 등 남북 대화가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었다. 성공리에 끝난 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가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경제, 사회, 외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파급효과가 있었다.

서울올림픽의 경제효과는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실제 16일 간 열린 서울올림픽은 270만명의 관중이 들어왔고, 약 3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했다. 고용유발 효과는 34만명에 달했다. 생산유발 효과는 4조7000억원, 부가가치 효과는 1조8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됐다. 1988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은 1972억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올림픽 경제효과는 GDP 2% 수준에 달했다. 또 당시 4653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소득도 올림픽 개최 이듬해 5000달러를 돌파했다.

서울올림픽은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한국경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브랜드를 전세계 시장에 홍보하면서 관광, 레저, 전자, 통신 분야의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984년 ‘88올림픽의 경제성 평가와 효과분석’ 보고서를 통해 “올림픽 관련사업 추진은 지출이 발생한 부문은 물론 이와 관련된 여러 부문에서 추가수요를 발생시켜 결과적으로 많은 부문 생산이 증가하기 때문에 소득 및 고용이 유발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노 전 대통령 시절 추진됐던 ‘북방외교’도 빠질 수 없는 정책 중 하나다. 고인이 재임하던 시기는 소련이 붕괴하면서 동구 공산권 사회가 해체되던 격변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른바 ‘북방외교’를 천명하고 소련,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9월 국제 연합 입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7·7 선언 이래의 북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보좌진을 파견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연결하여 한소 정상회담과 한러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또 냉전 이후인 1992년에는 한국 전쟁의 적성국이었던 중국과도 국교를 맺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토지공개념 최초 실행자... 1기 신도시 등 도시 인프라 구축

노 정부는 지난 1990년 재벌기업의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비업무용 토지를 매각하지 않으면 은행대출을 회수하는 ‘5·8 조치’를 발령하기로 했다. 이 대책은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인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전 지사는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 강력 규제를 언급하면서 “노태우 정권에서 부동산 안정화를 목표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강제하기도 한 전례를 비춰보건대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강제조치는 여야 이견 없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또 토지공개념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한 것도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1980년대 후반 들어 3저(저금리, 저물가, 원화 약세) 호황의 여파로 부동산 투기가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를 골자로 하는 토지공개념을 도입했다. 토지를 일종의 공공재로 본다는 취지였다. 다만 토지공개념은 재산권 침해와 시장기능 왜곡 등을 이유로 헌재로부터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서,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사실상 사장됐다.

택지초과소유부담금제는 서울시와 광역시에서 가구당 200평 이상 택지소유자에게 주택부속토지는 공시지가의 7%, 나대지는 11%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국민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1999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 결정을 받았다. 개발이익환수제는 택지개발사업, 관광단지 조성 등 29개 개발사업을 시행하는 사업자에게 개발이익의 25%에 해당하는 개발부담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아직 존속하나 기업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비수도권은 2002년부터, 수도권은 2004년부터 부담금 부과를 중지한 상태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유휴지 등의 소유자에 대해 3년 단위로 전국평균 지가상승률의 150%를 웃도는 지가상승분에 대해 30~50%의 세금을 물리는 제도였다. 땅값이 급등한 지역에 대해서는 1년 단위로 미리 과세한 후 3년 단위로 정기과세시 정산토록 했다. 이 제도도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가 문제가 되어 1994년 7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아 1998년 12월 폐지됐다.

수도권 1기 신도시도 노 전 대통령 시절, 성공했던 부동산 정책이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엔 3저 호황과 베이비부머들의 결혼이 러시를 이루면서 1988년 한 해에만 서울 집값이 24% 치솟았다. 1기 신도시 개발은 1989년 시작됐다. 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등 5개 도시다. 서울 광화문을 중심으로 반경 20㎞ 안팎의 지역에 5개 주거단지 총 28만2000여 가구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당시 서울 전체 주택 수의 20%에 달하는 규모였다.

1기 신도시는 200만 가구 공급 계획이 발표된 이후 1989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1995년 고양 일산, 안양 평촌, 군포 산본을 시작으로 1996년 성남 분당, 부천 중동까지 총 5곳이 조성 완료됐다.

세종=박성우 기자(foxpsw@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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