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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과학이 사랑한 화가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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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미술품 복원업체, 다른 그림 뒤 숨겨진 피카소 누드화 찾아내고

인공지능으로 ‘청색시대’ 피카소 작법과 화풍 학습해 미완성작 완성

피카소는 상대성이론 영향받아 입체파 작품 ‘아비뇽의 여인들’ 그려

조선일보

피카소가 1903년 그린 '맹인의 식사'(오른쪽 위) 아래에서 여인의 누드 스케치(오른쪽 아래)가 발견됐다. 영국 연구진이 인공지능과 3D 프린터로 여인의 누드를 완성해 '외롭게 웅크린 누드'로 명명했다. /ESTATE OF PABLO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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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자리에 피가 묻어 있는 유리 조각은 새벽 공기에 물들어 투명에 가깝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젊은이들은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의 충돌 속에서 극도의 혼란과 상실감을 겪었다. 무라카미 류는 1976년에 발표한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사회와 타협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추락을 청색으로 상징했다.

청색은 세계적인 거장 피카소의 청춘을 대변하는 색이기도 하다. 이른바 청색 시대(1901~1904년)다. 당시 무명 작가이던 피카소는 늘 영양부족으로 실명(失明)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밑바닥 삶의 외로움과 비참함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후기 입체파의 그림을 보면 난해함에 두려움까지 느끼지만 청색 시대 그림은 젊은 날의 초상을 보는 듯 감정이 느껴진다.

피카소가 숨겨뒀던 젊은 날의 고뇌가 현대 과학의 힘으로 되살아났다. 영국의 미술품 복원 업체인 옥시아 팔루스는 지난 12일 “청색시대 피카소 작품인 ‘맹인의 식사(The Blind Man’s Meal)’ 밑에서 여성의 누드화를 찾아내 인공지능으로 색채까지 구현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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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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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유명 작가의 그림에서 숨겨진 스케치나 다른 그림을 찾는 일이 더러 있었다. 가난한 화가들이 재활용 캔버스를 애용한 탓이다. 고흐의 한 정물화는 화풍이 작가와 맞지 않는다고 작가 미상으로 분류됐으나, 그 아래에서 고흐의 누드화가 나와 진품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피카소가 청색 시대에 그린 1902년 작 ‘웅크린 거지’ 밑에서는 당대 스페인 화가 산티아고 루시놀이 그린 풍경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피카소는 풍경화의 절벽 가장자리를 여인의 등 부분으로 재활용하기까지 했다.

이번 복원은 숨겨진 그림을 찾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옥시아 팔루스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에서 인공지능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조지 캔과 앤서니 부라치드 연구원이 공동 설립했다. 두 사람은 인공지능에 청색 시대 피카소의 다른 그림을 학습시켰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터득한 피카소의 화풍대로 숨겨진 여성 누드화 스케치 위에 유화물감을 칠했다.

마지막으로 3D(입체) 프린터는 인공지능이 제공한 그림물감의 높이 정보에 따라 실제 캔버스에 유화를 만들어냈다. 이 그림은 ‘외롭게 웅크린 누드(The Lonesome Crouching Nude)’로 명명됐다. 피카소가 그리다 만 그림을 인공지능이 완성한 것이다. 이 회사는 앞서 피카소 작품 밑에서 나온 풍경화도 인공지능으로 복원했다.

옥시아 팔루스를 설립한 캔 연구원은 원래 화성 생명체 탐색에 인공지능을 적용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회사 이름은 화성에서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큰 곳의 지명”이라며 “그림 아래를 보는 것이 다를 뿐 우리가 하는 일이 땅 밑에서 생명체를 찾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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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1902년 작 ‘웅크린 거지’(왼쪽) 밑에서는 당대 스페인 화가 산티아고 루시놀이 그린 풍경화 스케치(가운데)가 발견됐다. 영국 연구진은 이 스케치를 토대로 인공지능으로 풍경화를 복원했다(오른쪽). /옥시아 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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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힘을 입은 피카소의 그림은 또 있다. 지난 4월 스페인 발렌시아 공대 연구진은 같은 시기 그려진 피카소의 작품 중 유독 한 그림에 균열이 더 빨리 생긴 이유를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피카소는 1917년 6~11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친구의 화실을 빌려 작품 네 점을 그렸다. 그런데 그중 ‘앉아 있는 남자’라는 제목의 작품에 다른 그림과 달리 균열이 많이 생겼다.

연구진은 X선 형광과 같은 첨단 광학 기술로 그림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밑바닥까지 분석했다. 그 결과 남자 그림에만 유독 두껍게 쓴 동물성 접착제와 더 조밀하게 짠 캔버스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습도 변화를 견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습도가 높으면 캔버스는 수축하고 반대로 습도가 낮으면 접착제에 스트레스를 줘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감 성분이 고착제의 지방과 결합해 그림 표면에 여드름 같은 ‘금속 비누’ 덩어리를 만든다는 것도 알아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흔히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를 떠올린다. 둘 다 20세기 초반에 대표적인 업적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특수상대성이론의 논문을 발표했고, 피카소는 1907년 입체파의 대표작인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렸다. 물리학자들은 피카소가 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받아 정면을 향한 여인의 얼굴에서 코는 옆에서 본 모습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2차원 평면인 그림에 3차원적인 시각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에서 X선과 인공지능, 3D 프린터까지 현대 과학의 피카소 사랑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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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1907년 작 '아비뇽의 여인들'. /M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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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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