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프레소]⑤ 영화 '이퀼리브리엄' 리뷰
대부분 독재자는 사회 혼란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은 질서를 바란다. 자신의 이상이 순조로이 실현되는 세계를 꿈꾼다. 지도자의 바람에 따라주지 않는 이들을 반동분자로 규정하고 체제에 순응시킬 뿐이다. 하지만 반골에 대한 처벌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사회 불안은 점점 커진다. 그래서 보통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권좌에서 축출된다.
일급 특수요원 존 프레스턴(크리스찬 베일)은 반동분자를 색출하고 처단한다. `이퀼리브리엄`은 그런 그가 감정의 소중함을 느끼며 변화하는 과정을 담았다.<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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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퀼리브리엄'(2002)은 평화주의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 '리브리아'를 그린 영화다. 제3차 세계대전까지 거친 시민들은 또다시 전쟁이 발발해선 안 된다는 데 뜻을 모은다. 갈등 없는 세상을 향한 민중의 갈망을 업고 집권한 세력은 전쟁을 없앨 묘안을 낸다. 모든 싸움의 출발점인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정'이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약물 프로지움을 개발하고 시민들이 하루 세 번씩 이를 주사하도록 강제한다. 전쟁 없는 세계를 향한 정부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절멸 위기를 겪었던 리브리아 시민들은 정부의 급진적 정책에 동의한다. 그들은 옆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세 번 목에 약물을 주사한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정부는 주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색출할 법의 수호자 집단을 만든다. 이름하여 그라마톤 클레릭이다. 타인 감정 변화를 느끼는 능력을 타고난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프로지움을 거부하는 범법자들을 찾아낸다.
존 프레스턴이 프로지움을 살펴보고 있다. 리브리아 시민들은 하루 세 번 이 약물을 주사해 감정을 없애야 한다. <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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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레스턴(크리스천 베일)은 그라마톤 클레릭 안에서도 가장 우수한 특수요원이다. 프로지움을 투약하지 않은 채 문화 생활을 즐기는 반역자들을 일망타진한다. 이들이 바닥에 숨겨놓은 '모나리자'가 진품임을 판별한 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소각을 명령한다. 명화의 예술사적 중요성이나 금전적 가치는 그에겐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집을 숨겨놓고 읽는 것을 보고 처단한다. 과거에 본인 부인이 프로지움을 투약하지 않다가 화형당할 때도 구해주지 않았던 프레스턴에겐 동료를 벌하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었을지 모른다.
프로지움 미투약으로 감정을 느끼게 돼버린 프레스턴이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곤란해 하고 있다.<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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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없진 않다. 이를테면 특수요원들 역시 프로지움을 맞아 감정이 없긴 마찬가지인데 왜 '좋은 경력'을 만드는 데 집착하는지 질문이 생긴다. 그들이 '좋은 경력'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반대로 '나쁜 경력'은 피하고 싶다는 의미인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경력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프레스턴의 동료가 예이츠 시집을 몰래 숨어서 읽는 모습. 프레스턴은 그를 처단한다.<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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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본적으론 리브리아 시민들은 왜 꼬박꼬박 프로지움을 맞는지 궁금해진다. 감정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해진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냐는 것이다.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불편함 또는 불안 등이 없으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의무를 이행한단 말인가. 또한 프로지움은 하루 세 번 투약하는데, 그럼 점심 때 주사하기 직전에는 아침 투약분 약발이 떨어져서 감정이 조금은 느껴지는 상태인지도 궁금하다. 실제 여러 관객이 플롯의 엉성함을 꼬집는다.
프레스턴의 파트너 브랜트는 프레스턴이 보이는 여러 행동에서 수상함을 감지한다.<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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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질문에 한번에 답을 내리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설정을 하나 더해야 한다. 바로 프로지움이 감정을 없앤다는 정부 설명은 가짜이고, 리브리아 시민 모두 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는 가상의 세계에서 집권 세력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약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다. 프로지움은 아무런 효능이 없는 약이거나, 기껏해야 감정의 강도를 줄이는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프레스턴은 자신이 체포한 `감정유발자` 메리에게 연민을 느낀다. <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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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정해진 시간에 프로지움을 맞고, 감정이 완전히 없어진 것처럼 행동할까. 무섭기 때문이다. 리브리아에서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산 채로 소각해버린다. 화형당하기 싫다는 공포심이 이들로 하여금 프로지움을 맞게 하고 감정이 없어진 사람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다수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일이 두려운 것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출하지 않을 뿐이다.
허술한 부분이 곳곳에 있는 영화지만 현실과 비교하며 보기에 재미난 지점도 많다. 하나는 독재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퀼리브리엄'에서 독재사회를 유지하는 데 경찰과 군인보다 더 효과적인 도구는 시민들 간 자발적인 감시 체계였다. 친구들끼리 서로를 고발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규율 준수 여부를 감시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목하는 눈이 많다고 생각되면 인간은 자기검열에 철저해지게 된다.
감정을 느끼게 된 프레스턴을 감시하는 눈이 많다.<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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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롭고 민주적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자유로운 감정과 의견을 표출하기가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급속도로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됐던 온라인 공간은 다른 한편으로 대중과 어긋난 의견을 솎아내는 기능도 하고 있다. 강력한 팬덤을 지닌 이의 말에 반박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SNS상에서 조리돌림당하고 신상이 공개되기 십상이다.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온라인 공간에서 냈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광경을 본 사람은 본인 목소리를 내는 일에 주저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선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달하고, 타인 것과 조율하며 보다 나은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평균적 의견에 자기 감정을 맞춰가려는 시도가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집권 세력이 자신에 대한 팬덤을 잘 활용하는 국가에선 소수의 목소리를 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불편감, 실망, 슬픔, 분노, 좌절을 못 느낀 것처럼 행동하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민들에겐 최소한의 것만 누리길 강요하는 독재자가 스스로는 최대한 많이 누리려고 하는 위선적 행태도 묘사한다. 주인공 프레스턴은 인간에게 이토록 끔찍한 일을 벌인 사람 얼굴을 보기 위해 사회 지도층의 방에 들어선 뒤 놀라고 만다. 바로 그곳은 색채 없는 도시와 완벽히 대조될 만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에겐 감정이 질병이라며 철저히 억압했던 이들이 뒤에선 누구보다도 다채로운 감정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자기 방 안에서조차 성공하기 어렵단 메시지다.
`이퀼리브리엄` 포스터.<사진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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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액션, 드라마, SF
주연: 크리스천 베일, 에밀리 왓슨, 타이 디그스
감독: 커트 위머
평점: 왓챠피디아(3.7),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41%) 팝콘지수(81%)
※ 10월8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넷플릭스,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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