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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김여정 한마디에 울고 웃는 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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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 선언을 제안한 것을 두고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여정은 이를 위한 ‘때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면서 “적대시 정책부터 철회하라”고 했다. 이전 담화 때와 같은 욕설이나 막말은 없지만 ‘대북 제재 해제가 먼저’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대화를 위한 인센티브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바이든 미 행정부가 이를 수용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이날 김여정 담화에 대해 “무반응보다 좋은 신호” “무게 있게 받아들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와대는 지난주 김여정이 문 대통령 실명을 거론하며 “우몽하기 짝이 없다”고 비난했을 때는 “입장이 없다”고 침묵했지만, 이날 ‘종전 선언 좋은 발상’ 한마디에 즉각 맞장구를 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지난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종전 선언 추진을 제안한 데 대한 북한의 반응은 이날 오전 리태성 외무성 부상 명의 담화를 통해 먼저 나왔다.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는 미국의 대북한 적대시 정책이 있고, 이것이 남아있는 한 종전 선언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김여정 담화는 이로부터 7시간 뒤 나왔다. 톤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핵심 골자는 리태성 담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여정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정전 상태를 물리적으로 끝장내고 상대방에 대한 적대시를 철회한다는 의미에서 종전 선언은 나쁘지 않다”고 평가한 뒤 ‘적대시 정책 철회’ ‘불공평한 이중 잣대 폐기’ 등 선결 조건을 줄줄이 제시했다. 그러면서 “대립 관계를 그대로 둔 채 애써 웃음이나 지으며 종전 선언문이나 낭독하고 사진이나 찍는 것이 누구에게는 간절할 지 몰라도 진정한 의미는 없다”고 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문 대통령이 ‘임기 말 남북 이벤트’를 원한다는 것은 북한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날 김여정 담화의 핵심은 한국이 나서서 미국을 설득해 자신들이 원하는 ‘제재 해제’ 등을 얻어내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선(先)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북한이 일관되게 고수해온 주장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올 1월 초 제 8차 노동당 대회에서 “새로운 조미(북미) 관계 수립의 열쇠는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는 데 있다”고 했다. 김여정이 이날 문재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을 일단 긍정 평가한 것도 ‘한국이 역할을 하라’는 의미다.

문 대통령은 임기 말이 다가오면서 북한 문제에 더 집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엔총회 참석을 위한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기내 간담회에서도 문 대통령은 “상생과 협력의 한반도를 위해 남은 임기 동안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우리 정부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했다. 앞서 청와대는 북한이 최근 잇단 미사일 도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반응을 자제했다. IAEA가 “북한이 핵 프로그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우려를 한 데 대해서도 “별도 의견이 없다”고 했었다. 그만큼 북한과 대화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와 정부가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전후로 뭔가 이벤트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며 “남북 관계 개선은 대통령이 꼭 결자해지하고 싶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 1월 신년 회견 등에서 “북한 문제는 서두르지 말라”고 강조했지만, 최근에는 북한의 변화 움직임이 없는 상황에서도 속도를 내려고 하고 있다. 내년 3월 대선과 5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남북 대화쇼’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조선일보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2월 방남한 당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국립중앙극장에서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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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대화 교착의 근본적 원인인 비핵화 방법론을 둘러싼 미·북 이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종전 선언 같은 상징적 이벤트가 성사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북이 서로를 떠보기 위한 대화를 할 수는 있지만, 미국은 선(先) 비핵화 진전이 먼저라는 입장에서 변한 게 없다. 이날 미국 국무부 고위관계자는 종전 선언 제안과 관련한 질문에 “우린 미국뿐 아니라 동맹과 우리의 배치된 군대의 안보를 증진하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기 위해 조정되고 실용적인 접근법의 일환으로써 북한과의 관여를 계속해서 모색할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표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무리하게 종전 선언을 밀어붙이다가는 한미 동맹만 손상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또 종전 선언을 위한 대화가 성사되더라도 2019년 ‘하노이 노딜’과 같은 결과가 되풀이될 수 있다. 김여정이 이날 ‘사진이나 찍는 것은 의미 없다’고 한 것도 하노이에서 김정은이 겪었던 굴욕 사태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발언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적극적으로 종전 선언 분위기 띄우기에 나섰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수통수석은 이날 연달아 라디오, TV에 출연해 “김여정 부부장은 매우 격식 있고 무게 있게 대한민국의 역할에 대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김 부부장 담화를 무게 있게 받아들이면서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 중에 있다”고 했다. 리태성 부상 담화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화의 길이 열려 있다는 메시지”라며 “좋은 신호가 아닐까 한다”고 했다.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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