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4 (일)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미군 오폭에 아프간인 억울한 죽음… 궁지 몰린 바이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장병 13명 전사 후 보복 혈안 된 미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드론 날려 폭격

알고보니 미군 협력자… “참담한 실수”

세계일보

지난 8월 2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공항 근처에서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이 저지른 자살 폭탄 테러로 연기가 치솟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 중인 미국 구호단체 ‘영양과 교육 인터내셔널’(NEI) 직원 제마리 아흐마디는 미군의 아프간 완전 철수가 임박한 8월 29일 아침(현지시간) 상사로부터 “출근할 때 내 집에 들러 노트북을 갖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흐마디는 흰색 토요타 1996 코롤라를 몰고 카풀 동료 두 명을 태운 다음 상사의 노트북까지 챙겨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누군가 아흐마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미군 요원들이었다. 며칠 전 카불공항 인근에서 ‘이슬람국가 호라산’(IS-K) 일당이 자행한 자폭 테러로 장병 13명을 잃은 미군은 보복에 혈안이 돼 있었다. 마침 아흐마디가 노트북을 챙기려고 들른 상사의 집은 IS-K의 로켓 발사대 인근이었다. 공교롭게도 아흐마디가 몬 차량은 앞서 IS-K 일당이 폭탄을 실은 차량과 같은 브랜드의 비슷한 모델이었다. 또 아흐마디가 출근 전 들른 세 곳 중 한 곳은 IS-K 은신처와 가까웠다.

아흐마디가 IS-K 비밀요원이란 미군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8월 14일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 카불을 장악한 뒤 수도가 끊긴 집이 많았다. 이에 아흐마디와 동료들은 생수통을 가져와 사무실에서 물을 받아가곤 했다. 이날도 그는 트렁크에서 커다란 플라스틱통을 꺼냈다 실었다를 반복했다. 그를 감시하는 미군이 보기에 이는 폭탄을 차량에 적재하는 행동임이 분명했다. ‘됐어, 바로 저 놈이야. 미군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하루 일과를 마친 아흐마디가 집까지 몰고 온 차를 세우자마자 미군은 곧장 드론 미사일을 발사했다. 아흐마디와 그의 세 자녀, 사촌 등 일가족 10명이 숨졌다.

공격 직후 오폭 논란이 불거졌다. 아흐마디가 IS-K 비밀요원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그와 무관한 어린이 등 민간인이 사망한 것만으로도 커다란 잘못이었지만 미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3명뿐”이라며 “나름의 정보에 근거해 최대한 합리적 결론을 내렸다”는 입장만 고수했다. 뉴욕타임스(NTY) 등 언론의 잇따른 문제 제기에 미 정부 관계자도 “운전자(아흐마디) 신원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IS-K 은신처를 오간 점, 커다란 짐을 실어나른 점 등으로 미뤄 폭탄 공격에 연루됐다고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고 어정쩡하게 답하며 일단 군부 손을 들어줬다.

세계일보

지난 8월 2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아프가니스탄 사태 관련 기자회견을 하던 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숨진 아흐마디가 미국 구호단체 협력자였다는 점이 확실해지면서 미군은 궁지에 몰렸다. 아흐마디와 함께 숨진 조카 나세르도 미군 조력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둘 다 미국 이주를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결국 미군은 고개를 숙였다. 지난 17일 아프간을 관할하는 케네스 매켄지 미 중부사령관은 미 국방부 출입기자단 앞에서 “참담한 실수였다”며 오인 공습을 시인했다. 이어 유족 등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족은 분이 덜 풀린 모습이다. 그들은 “사과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며 공습 책임자가 처벌받아야 한다”고 AP 통신 등 외신에 밝혔다. 외신은 “유족이 경제적 보상과 함께 미국이나 안전한 다른 나라로의 이주도 원한다”고 소개했다.

카불공항을 통해 도망치듯 아프간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으로 미국인들의 신뢰를 잃은 조 바이든 대통령은 더욱 더 곤란한 지경이 됐다. 엄밀히 말하면 처벌을 받아야 할 최고 책임자는 바이든 대통령 본인이기 때문이다. IS-K의 자폭 테러로 미군 13명이 전사한 뒤 그는 보복 공격 개시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에 맡겼고, 미 언론은 이를 “사실상 백지수표를 위임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미 국방부는 이번 오폭 사태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에 관한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