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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베임 앞두고도 "예수, 마리아" 부른 조선시대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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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확인 순교자들, 전통예식 거부하고 신앙지키다 극형

순교자들 유해 수습 '복자 유항검' 헌신 주목

연합뉴스

한국 천주교 순교자 유해
(전주=연합뉴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등의 유해가 사후 200여 년 만에 발견됐다고 1일 천주교 전주교구가 밝혔다. 사진은 발굴 과정에서 확인된 순교자 유골이다. 2021.9.1 [전주교구 제공. 재배포 및 DB금지] (끝)



(전주=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전북 완주군 초남이성지에서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등 순교복자 3인의 유해가 발견된 사실이 알려지며 이들의 생전 순교 과정에도 관심이 쏠린다.

1일 천주교 전주교구에 따르면 초남이성지에서 사후 200여 년 만에 유해가 확인된 순교자는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다.

고산 윤선도의 6대손인 윤지충은 1759년 출생해 25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1784년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고종사촌인 정약용 형제의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1751년생인 권상연 야고보는 본래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사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로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했다.

윤지충은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리자 권상연과 함께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1791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천주교 예법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피신했는데, 윤지충의 숙부가 대신 잡혀가자 둘 다 관아에 자수했다.

당시 전주 감사는 둘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결국 둘 다 1791년 11월 13일 전주 남문밖에서 참수를 당했다.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 때의 일이었다.

윤지충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도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칼날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예수, 마리아"를 노래했던 것으로 전주교구 측은 전했다.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형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리를 접했다.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형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갔다.

1791년 형이 순교하자 고향을 떠나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그의 교회 활동이 관청에 알려지며 동료들과 함께 체포돼 능지처참 형을 받고 37세 나이로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의 유해가 200여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데에는 복자 유항검의 헌신적 신앙과 동료애가 바탕이 됐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유해가 발견된 곳은 유항검의 소유이자, 그가 가족과 함께 한동안 묻혔던 초남이성지다.

당시 초남이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했던 유항검은 위험을 무릅쓰고 중죄인으로 간주돼 끔찍한 죽음을 맞은 동료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자신의 땅에 묻었을 것으로 전주교구는 추정했다.

유항검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평소 그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봤던 몇몇 교우들이 순교한 윤지충 시신과 초남이성지에 묻었을 것으로 봤다.

edd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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