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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타이태닉 침몰” 전한 전보기사… 라디오·TV시대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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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17] 라디오와 TV 선구자 데이비드 사노프

오늘날 방송이 가능한 것은 독일의 개종 유대인 하인리히 헤르츠가 1887년 공기 중에 ‘전파(전자기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를 기초로 이탈리아인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1897년 모스 부호를 이용해 무선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신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1906년 캐나다 출신의 미국 무선공학자 레지널드 페선던이 전파에 음성을 실어 전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라디오의 기원이었다. 이후 라디오 방송의 상업화를 이끈 사람이 데이비드 사노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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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매사추세츠주 동쪽 바다 난터켓섬의 전신 사무소에서 전신을 보내고 있는 젊은 시절의 데이비드 사노프. 러시아 민스크 태생의 유대인 이민자였던 사노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고학하며 가족을 부양하다, 전보 배달부를 거쳐 독학으로 모스 부호를 익혀 17세에 무선 전신 기사가 됐다. 1912년 4월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 때 뉴욕의 해안 전신소에서 SOS 메시지를 받아 전파하며 생중계하듯 침몰 소식을 전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1921년엔 권투 헤비급 세계 타이틀전의 인류 최초 라디오 중계를 성사시키는 등 무선 전자 기기 회사 RCA와 방송사 NBC의 회장을 지내며 20세기 중반 거대한 미디어 제국을 지배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아버지가 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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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데이비드 사노프가 그랬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라디오 시대와 TV 시대를 열었다. 그보다 먼저 라디오 방송과 TV 방송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공공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사노프는 엔터테인먼트를 전면에 내세워 방송의 대중화를 이끌어냈다. 선구자 사노프의 통찰력 덕분에 현재의 방송 산업이 있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러시아 민스크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동으로 소문나 그의 부모는 그에게 탈무드 학자가 되는 공부를 시켰다. 그러다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00년 그의 부모는 아홉 살 된 데이비드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가장이 된 그는 고학으로 신문팔이, 심부름꾼, 짐꾼, 유대회당에서 예배 중 노래하는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보 배달부가 됐다. 그런데 전보 배달부보다는 전보 기사가 돈을 더 많이 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첫 월급으로 전신 기구를 샀다. 독학으로 모스 부호를 배웠고, 월급이 훨씬 많은 ‘아메리칸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이후 사노프는 무선 기술을 인정받아 17세에 무선 기사로 승진해 주로 선박과 해안 전신소에서 근무했다.

타이태닉 침몰 소식을 세상에 전하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12년 4월 14일, 영국을 떠난 대형 유람선 한 척이 빙산과 충돌해 좌초했다. 이때 뉴욕 해안 전신소에서 근무 중이던 사노프가 그 배에서 SOS 메시지를 받았다. 그 배는 다름 아닌 유명 인사 2200여 명이 탄 타이태닉호였다. 사노프는 우선 현장에 구조선을 급파하도록 조치하고 즉시 사방에 그 소식을 알렸다. 그러고 그때부터 3일간 밤낮으로, 사건 현장의 구조선들에서 전달되는 생존자 700여 명 명단 등을 뉴욕타임스 등 미디어에 내보내며 침몰 과정을 생중계했다.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사노프는 맡은 책임을 훌륭히 해냈다. 주고받은 무선 신호를 분석한 기고문을 신문에 실어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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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가 개발한 최초의 비디오 테이프와 레코더 광고에 직접 등장한 사노프 당시 RCA 회장. 미 시사주간지 타임 1954년 2월 15일 자에 실린 광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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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아이디어, 일축당하다

사노프는 마르코니사에서 고속 승진하며 세상을 뒤바꿔놓을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오늘날의 라디오 개념을 처음 생각해낸 것이다. 같은 무선 주파수를 사용한다면, 1대1 통신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명이 수신할 수 있다는 데 착안했다. 특히 사노프 아이디어의 혁명적 부분은 ‘보내는 내용’에 있었다. 사노프는 1915년 ‘라디오 뮤직박스’에 대한 계획서를 경영층에 제출했다. “저는 지금 무선을 통해 음악을 가정에 보내자는 것입니다. (중략) 그 수신기는 간단한 라디오 뮤직박스(오늘날 라디오) 형태로 만들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다른 파장에도 맞춰서 꾸밀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라디오는 메시지 전달 기구로서 주로 해운업에서 쓰고, 일부는 아마추어 동호회에서 취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노프의 계획서에는 라디오가 피아노나 전화처럼 가정에서 사랑받는 새로운 가정용품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회사 경영층은 이 아이디어를 상업의 상 자도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며 일축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세계 최초 라디오 방송국이 1920년에 개국한 것을 보면 1915년의 그의 선견지명은 너무도 탁월한 것이었다.

마침내 열린 라디오 방송 시대

세월이 지나 1919년, 제너럴일렉트릭(GE)이 마르코니사를 사서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무선통신 전자제품 회사)를 만들었다. 새 회사에서 사노프는 영업부장을 맡았다. 1920년 세계 최초 방송국 필라델피아 KDKA가 개국하자 사노프는 마음이 바빠졌다.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상업성 라디오의 가능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로 했다. 사노프는 무선통신을 즐기는 애호가들을 상대로 ‘인류 최초의 라디오 중계방송’을 감행했다. 1921년 7월 2일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권투를 중계한 것이다. 놀랍게도 30만명이 ‘자체 제작한 수신기’로 사노프의 중계방송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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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사노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돼 1920년대 미 RCA가 개발·판매한 라디오 수신기‘라디올라’초기 제품. 켜고 끄는 스위치, 볼륨과 주파수 조절 노브만 달린 디자인은 이후 대량생산된 라디오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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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프는 1921년 총지배인으로 승진하자 자신이 6년 전에 제안했던 ‘라디오 뮤직박스’ 사업 계획서를 다시 회사 경영층에 내놓았다. 이번엔 그의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 음악뿐 아니라 뉴스, 스포츠 중계 등을 시간대별 프로그램으로 방송할 수 있게 고안한 라디오 뮤직박스가 만들어졌다. 그의 기술을 바탕으로 1922년 RCA는 라디오를 대량생산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전국적으로 보급한다는 그의 계획에 처음에는 모두 반신반의했지만, 야구 중계가 시작되자 순식간에 250만대가 팔려나갔다. ‘라디올라(Radiola)’라고 한 이 75달러짜리 기계로 RCA는 돈방석에 앉았다. 사노프의 라디오는 새로운 소식과 음악, 스포츠 중계 등을 전해주어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방송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침울했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노프는 1926년엔 계열사로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방송국을 설립해 전국에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혜안으로 TV 시대도 실현

사노프의 다음 관심은 1923년에 특허를 받은 텔레비전이었다. 그는 이를 상업용으로 키울 수 있다고 봤다. 사노프는 1923년 RCA 제작자 회의에서 TV 시대 출현을 예고했다. “저는 라디오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시대가 머지않아 도래하리라 믿습니다. 아마 미래에는 모든 가정에 TV가 설치될 것입니다.” 하지만 경영층 반응은 미지근했다. 최초의 상업용 TV 수신기가 1939년에 나온 걸 감안한다면, 1923년의 그의 혜안은 이번에도 놀라웠다.

사노프는 대공황으로 어려운 와중인 1930년 RCA 사장으로 승진했다. 최고경영자가 된 그는 비로소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대공황으로 매출이 반감하는 경영난에도 불구하고 TV라는 새로운 분야에 투자를 대폭 늘렸다. 마침내 RCA는 TV 수상기를 만들어 1939년 세계 박람회에서 선보였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막 연설을 생중계했다. 이어 등장한 사노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소리에 영상을 더합니다. 온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태어남을 저는 겸허하게 발표하려 합니다. 우울한 이 시대에 희망의 횃불이 되어 세상을 밝힐 기술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 창조적 위력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계·전자공학의 발달이 빚어낸 이 기적은 한편으로 미국의 새로운 산업으로서 발돋움할 것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미국 경제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사노프의 연설은 TV 상업 방송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었다.

[美 반독점 규제로 TV기술 급속 확산]

1941년 NBC방송국은 최초로 상업용 TV 방송을 시작했다. TV 보급이 한창일 때 2차대전이 터졌다. 그러자 사노프는 자원 입대해 준장으로 통신 부대를 지휘하다 종전과 함께 예편했다. 전쟁 뒤 그가 이끄는 TV 방송 산업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1954년 컬러TV 개발과 보급에도 성공했다. NBC는 TV용 영화를 처음 제작해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노프는 1970년 79세로 은퇴할 때까지 무려 23년간 회장으로 재직하며, RCA를 세계적 대기업으로 키웠다.

텔레비전이 세계적 산업으로 크는 데는 미국 법무부의 공로도 한몫했다. 1954년 이전까지만 해도 RCA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부문 특허 1만여 가지를 갖고, 특허 판매 사업을 하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는 이러한 독점을 깨기 위해 1954년에 RCA를 기소했고, 1958년 반독점 행위에 대한 규제가 시작됐다. 이는 사실상 전 세계에 텔레비전 기술을 급속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일본·독일·한국의 전자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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