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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소련도 병사 5만명 잃고 해체···아프간은 '강대국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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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아프간에서 철수하는 미군.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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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호기롭게 아프가니스탄(아프간)에 발을 들였던 미국이 사실상 패퇴하자 '열강의 무덤'으로 불려온 아프간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세기 대영제국, 냉전시기의 러시아에 이어, 21세기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마저 번번이 아프간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군했다.

아프간은 열강이 끊임없이 탐내온 나라다. 중앙아시아·남아시아·중동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부딪쳐온 지역이다. 주변국은 중국·파키스탄·이란·구 소련(현재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포진하고 있다.

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간 주도권을 놓고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하자, 영국은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차지하면 인도까지 넘볼 것을 우려해 길목인 아프간을 선점해 차단하려던 것이다. 영국은 제1차(1838~42), 제2차(1878~80), 제3차(1919)에 걸쳐 아프간과 전쟁을 치러 일시적으로 아프간을 점령해 지배했다. 하지만 아프간군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결국 1919년 아프간 독립을 허용했다.

소련은 냉전시기인 1979년 12월, 당시 친소련파 정권에 저항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세력 무자헤딘(전사들)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미국과 중국의 화해로 자신들이 포위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소련은 아프간을 중동 진출 교두보로 확보하려 했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프간 국민 다수의 맹렬히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10년간 전쟁 비용으로 840억 달러(약 97조원)를 쏟아붓고 병력 5만명을 잃은 채 1989년 철수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쟁의 실패가 소련 해체의 방아쇠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열강이 아프간을 침공하고도 완전한 정복에 줄줄이 실패한 데는 가혹한 기후, 거친 산악지역, 토착 세력의 끈질긴 저항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험준한 산악 지형에 숨어 끝없이 게릴라전을 이어가는 반군을 제압하려면 대규모 공습이 필요한데, 필연적으로 민간인 희생이 뒤따른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주민들의 저항도 거세져 열강들도 결국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탈레반은 1994년 아프간 남부에서 이슬람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걸고 처음 등장했다. 탈레반은 현지어로 '종교적인 학생' '이슬람 신학생'을 뜻한다. 이슬람 경전을 급진적으로 해석한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군사적 지원 속에 세력을 급속히 확대해 1996년 당시 라바니 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의 샤리아법(종교법)을 앞세워 사회를 통제했다. 도둑은 손을 자르고 불륜을 저지른 여성은 돌로 쳐 죽이는 벌을 허용했다.

탈레반 정권은 2001년 알카에다의 9·11 테러로 무너졌다.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9·11 테러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10월 7일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다. 탈레반 정권은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됐다. 전열을 정비한 탈레반은 20년을 버텼고, 미군 철수가 끝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을 함락하면서 아프간의 지배자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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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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