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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선별검사소에 물안개 뿜는 쿨링포그? 지자체 황당한 폭염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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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념, 보여주기식, 탁상공론… 지자체들의 황당한 폭염 대책

조선일보

지난달 28일 서울 은평구 선별검사소 천막 위에서 쿨링포그가 물안개를 뿜어내고 있다. 지난해 6월 방역 당국이 바이러스 확산 위험을 우려해 선별검사소 내 쿨링포그 설치를 금지하는 지침을 마련했지만, 일선 지자체에서는 여전히 쿨링포그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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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4시, 서울 은평구 보건소에 있는 선별검사소.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20여 명의 시민 사이로 뿌연 물안개가 쏟아졌다. 은평구청이 지난달 15일 대기 장소 천막 위에 설치한 이른바 ‘쿨링포그(물안개를 분사해 주변 온도를 낮추는 장치)’에서 뿜어내는 수증기였다. 마포구도 지난달 구(區) 보건소 앞 선별검사소에 440만원을 들여 이 장비를 설치했다. 무더위에 대기하는 시민들을 위한 나름의 폭염 대책인 셈이다.

하지만 이 장비는 ‘코로나 확산 위험’ 때문에 사용이 금지돼 있다. 의료진과 코로나 의심 증상자 등이 뒤섞이는 선별검사소에서 이 물안개를 타고 바이러스가 확산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은 작년 6월 ‘선별검사소 쿨링포그 사용 금지’ 지침을 만들었고, 보건복지부는 최근까지도 수차례에 걸쳐 이런 내용을 지자체에 전달했다. 행정안전부도 코로나 확산 우려를 이유로 작년부터 전국 모든 지자체에 사용 금지를 권고한 상태다. 이에 대해 은평구 보건소 관계자는 “관련 지침을 알고는 있지만 시민에게 물을 직접 분사하는 게 아닌 만큼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낮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지면서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무더위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코로나 방역 지침에 역행하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보여주기식’ 행정이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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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광장에 설치된 ‘스마트 그늘막’ 아래에서 시민들이 햇빛을 피하는 모습.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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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이 ‘스마트 그늘막’이다. 스마트 그늘막은 횡단보도 주변에서 대기하는 시민들이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기존 그늘막에 ‘자동 개폐 기능’을 더한 것이다. 주변의 온도·풍속 등에 따라 자동으로 접히고 펴지는 것이다. 현재 서울 광진구(40개)·동작구(39개)·용산구(15개) 등에 설치돼 있다. 문제는 가격이다. 이 첨단 장비는 기존 수동 그늘막(약 200만원) 가격의 4배인 800만원에 달한다. 서울의 한 자치구 관계자는 “기존 수동 그늘막도 태풍이 불지 않는 이상 접을 일이 거의 없는 데다, 개폐도 동 주민센터 공무원이 담당하기 때문에 유지 비용은 따로 들어가지 않는다”며 “아직 그늘막도 전부 보급하지 못한 상황에서, 같은 돈이면 수동 그늘막 4개를 사는 게 낫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사실상 보여주기식 행정”이란 말이 나온다.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그늘막 수가 가장 많은 송파구(212개), 서초구(204개)는 아예 스마트 그늘막이 없다. 반면 스마트 그늘막이 가장 많은 광진구, 동작구의 전체 그늘막 수는 각각 125개, 107개로 서울 자치구 가운데 중하위권이다.

‘야외 무더위 쉼터’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로 ‘실내(室內) 무더위 쉼터’들이 줄줄이 폐쇄되자 대안으로 야외 쉼터를 늘리겠다고 했다. 지난달 기준 전국 야외 무더위 쉼터는 7600여 곳이다. 하지만 본지가 돌아본 서울 시내 6곳의 야외 무더위 쉼터는 대형 파라솔 형태의 ‘그늘막’만 덩그러니 설치된 형태로, 이용자가 한 명도 없었다. 공사 현장 주변에 그늘막을 설치해 시민들이 접근할 수 없거나, 의자가 없어 앉을 수 없는 곳도 있었다.

폭염 취약 계층이 다수 거주하는 쪽방촌 인근 ‘실내 무더위 쉼터’의 이용 지침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지자체가 이 시설을 ‘노숙인 시설’로 분류하는 바람에, 쉼터를 이용하려면 ‘최근 1주일 이내에 받은 코로나 음성 결과’를 지참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3일 방문한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중구 남대문 쪽방촌 인근 주민들은 이 지침 때문에 쉼터에 들어가지 못한 채 야외에서 연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이모(59)씨는 “에어컨 바람 쐬자고 어떻게 매주 코로나 검사를 받느냐”며 “그냥 이용을 포기한 상태”라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쪽방촌 주민들이 노숙인은 아니지만, 쪽방촌 무더위 쉼터가 ‘노숙인 시설’로 분류돼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유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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