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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이슈 김정은 위원장과 정치 현황

결국 김정은 청구서 키워줬다…文정부의 한·미훈련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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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훈련 둘러싼 남·북·미 입장 변화

北 기대감 키운 트럼프 "연합훈련 취소"

文 "비핵화 진전시 취소 검토" 맞장구

2019년 판문점 회동 뒤에도 훈련 계속

반감 커진 北, 김여정이 내민 '청구서'

한·미 동맹-남북관계' 사이 딜레마

북한이 남북 간 통신연락선 복원 뒤 요구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연기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관계의 주요 변곡점마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북한은 연합훈련을 '전쟁연습'이라며 반발하고, 대화에 목마른 한국은 고민에 빠지는 양상이 반복됐다. 한·미 연합방위력 제고의 핵심에서 2018년 남·북·미 간 대화국면 이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연합훈련 잔혹사'를 정리했다.



①기(起) : 기대감의 시작



중앙일보

2018년 3월 정의용(왼쪽) 국가안보실장은 수석 대북특사 자격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한미연합훈련과 관련 "어려움을 알고 있다.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정 실장은 밝혔다.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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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처음부터 연합훈련을 맹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3월 한국 정부의 방북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특사단 대표였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연합훈련 때문에 남북관계가 단절돼선 안 된다”고 하자, 김정은은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고 답했다는 게 정 실장이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이다.

연합훈련의 명분을 스스로 깎아 먹은 건 오히려 미국이었다. 트럼프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뜬금없이 연합훈련이 '도발적(provocative)'이라며 문제삼았다. ‘워 게임(war game)’이라 표현하며 돌연 “연합훈련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트럼프의 불만은 결국 ‘비용 문제’였다. 그는 “엄청난 돈을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쓰고 있다. 괌에서 한국까지 폭격기가 날아가 훈련하는 데 큰 비용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방위비 증액을 염두에 둔 듯 “한국도 (훈련 비용을) 부담하지만 일부일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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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2일(현지시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연합훈련을 취소하겠다"는 폭탄 발언을 꺼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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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물론 미 국방부조차 몰랐던 트럼프의 폭탄 발언에 청와대가 “발언의 정확한 의미와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인 것도 잠시, 문재인 대통령은 6월 1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를 주재하며 “연합훈련 중단 여부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 실천'을 전제로 들긴 했지만, 한·미 정상의 이런 입장 표명은 연합훈련 무력화에 대한 북한의 기대를 키우기엔 충분했다.



②승(承) : 문서화 성공



중앙일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9.19 군사합의를 도출했다. 이 합의서엔 "대규모 군사훈련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해 협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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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9.19 군사합의가 북한으로썬 ‘굳히기 찬스’였다. 남북 정상 간 논의 내용을 명문화한 군사합의서엔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해 협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연합 준비 태세를 점검하는 연합훈련의 규모와 시기 등을 남북이 협의해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한 문구였다.

앞서 연합훈련은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이유로 한 차례 유예됐고, 같은 해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실기동훈련이 중단되는 등 이미 규모가 대폭 축소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남북 국방당국 수장이 서명한 9·19 군사합의가 도출되며 북한으로선 연합훈련에 대한 상징적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한 사실상 개입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③전(轉) : 트럼프의 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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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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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 딜’로 끝나며 남북 및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연합훈련은 여전히 규모가 축소된 채이긴 했지만, 북한의 기대와 달리 취소나 연기 등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트럼프의 ‘연합훈련 취소’ 발언, 문 대통령의 ‘연합훈련 취소 검토’ 입장에 이어 9·19 군사합의에도 연합훈련이 실시되자 북한은 보다 노골적이고 강도 높게 연합훈련을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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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이 만나 연합훈련 취소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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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북한은 2019년 6월 30일 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났을 당시 트럼프가 김정은에 연합훈련을 취소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최고위급에서 한 공약을 어기고 남조선과 합동군사연습을 벌려놓으려 하고 있다”(2019년 7월 16일 조선중앙통신 보도 북한 외무성 대변인 발언)

김정은은 친서를 통해 직접적 불만도 표출했다. ‘워터게이트’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2020년 9월 출간한 『격노』에 따르면 김정은은 2019년 8월 트럼프에 보낸 친서에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주요 이슈를 논의할 우리 두 나라(북·미)의 실무 협상에 앞서서 취소 또는 연기될 것으로 믿었다”며 “나는 분명히 불쾌하고 이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고 항의했다.



④결(結) : 공식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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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외교적 접근'을 기반으로 하지만 북미 대화를 위한 제재 완화나 연합훈련 취소 등에 대해선 단호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 딜' 이후 약 2년6개월만에 남북 대화 국면을 맞게 된 문재인 정부는 연합훈련을 둘러싼 고심이 깊어지게 됐다. 사진은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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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나마 연합훈련을 대북 유인책이나 협박책처럼 이용하려던 트럼프는 떠났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며 북한 입장에선 더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게 됐다. 바이든은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하게 임하기 전에는 인센티브는 없다’는 대북정책의 원칙을 명확히 했다.

북한 입장에선 문 정부를 흔드는 게 가장 효율적 카드였다. 김정은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통신선 복원 합의 사흘만인 지난달 30일 통일부 고위 당국자가 ‘연합훈련 연기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식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지난 1일 담화를 내고 현 상황을 “지금과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로 규정하며 “(연합훈련은) 북남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약 13개월 만에 통신선 복원에 합의한 대가로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 연합훈련을 취소하라는 노골적 압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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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연합훈련 실시 여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아직 명확치 않다. 청와대는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미 양국이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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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한·미 동맹과 남북관계 중 선택하라는 시험대 앞에서 정부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한·미 양국이 협의중"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반복하는 이유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을 택하든 북한의 반발이나 동맹에 대한 악영향, 둘 중 한가지 결과는 정부가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임기 4년 내내 스스로 연합훈련을 대북 관여정책에 연계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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