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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나는 이런 보수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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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진보의 갈래가 다양한 것처럼, 보수 역시 수많은 분파로 구성되어 있다. 신중했지만 항상 반개혁적이지만은 않았던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시장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에 이르기까지. 그렇지만 우리의 보수를 정의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현상(Status quo)을, 가진 것을 그대로 지켜내는 것. 그래서 이런 자연스러운 본능을 옹호하기 위해 특별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보수는 몇 발짝 더 후퇴하여 현 상태가 아닌 과거까지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야당의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은 통일부 폐지론에 비해 현저히 더 집요하며 비논리적이다. 스웨덴에서 실업부를 창설하라는 요구가 있었을 때, 당시 올로프 팔메 총리는 “내각의 모든 장관이 실업과 싸우는 전사”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모든 부처의 장관이 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면 여성부 폐지에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만, 그럴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보수가 비판하는 여성부의 문제는 대부분 타 부처의 무관심과 비협조로부터 기인한다.

서로 다른 남녀에 대한 동일한 처우가 불평등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여성을 특별히 배려하는 정책만 사용하면 그로 인해 또다시 고용주의 차별 유인이 발생할 수 있다. 여성만 사용 가능한 휴가가 못마땅하다면 남성도 함께 당연한 권리로서 병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다. 좋은 보수라면 인구절벽을 앞두고 모든 생산가능인구의 경제활동인구로서의 전환이 시급해질 이 중요한 시기, 여성을 다시 이등 시민으로 떨어뜨릴 궁리에만 매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공정한 시장경쟁을 가로막는 차별 금지를 통해 여성과 남성 모두 노동시장과 가정의 삶에서 평등하게 공존할 방법을 찾아주었을 것이다.

최근 넘쳐나는 반노동, 반복지적 언급들도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일념을 반영한다. 주 120시간 노동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어넘긴다 해도 시도 때도 없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은 정치가로서의 기본 자질마저 의심케 한다. 독재 시기 보수 정권이 만든 기업별 노조의 칸막이에 막혀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운동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에 의거해 만들어진 조직을 ‘죽여야’ 청년이 산다니, 그렇다면 노동운동을 하는 청년은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한겨레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오른쪽),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5일 서울 광진구 한 치킨집에서 만나 건배하고 있다.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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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보수라면 이런 시대착오적인 언술을 펼칠 시간에 현재 기업이 부담하고 있는 사적 복지를 국가의 보편적 복지로 전환할 방안을 마련해주었을 것 같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는 임금 격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의 정규직이라면 자녀의 대학 학자금 등 다양한 복지의 수혜자가 되지만 불안정 노동자는 이 모든 보호망 밖에 있다. 기업이 정규직 고용을 기피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보수가 원하는 경제성장과 유연한 노동시장을 위해서는 노조에 대한 혐오 이상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독일의 보수 정치가 비스마르크가 그러했듯이.

재난지원금마저 기어코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고 마는 선별적 복지에 대한 과다한 집착과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근거 없는 희화화 역시 합리적 보수라면 재고했을 일이다. 선별적 복지의 이면 효과는 치명적이다. 하층 복지수혜자를 공공연하게 비난하며 조세 저항이 극심한 미국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세금은 더 많이 내지만 받지 못하는 자의 소외감이 무관심을 거쳐 상대에 대한 혐오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페미’가 싫다면 그간 얼마나 극단적인 여성차별이 행해졌는지, 노조를 없애고 싶다면 그간 우리가 얼마나 극심한 노동착취의 사회였는지, 보편적 기본소득이 불만스럽다면 그간 우리가 얼마나 지나치게 복지에 인색했던지 먼저 성찰하면 좋겠다. 보수가 반대하는 이 모든 현상은 실제로 무능력했던 보수 정치가 배태했던 것들이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며 상충 관계에 있지 않다. 역량 있는 보수가 훌륭한 진보를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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