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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미 파국, 그러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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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

‘랑종’과 ‘블랙 위도우’

인간이 초래한 팬데믹과 열돔 현상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 향한 분노

파국 초래한 자 책임 못 묻는 ‘랑종’

비판하되 혐오하지 않는 ‘블랙 위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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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종> 스틸컷. 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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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돔이 한반도를 덮었다. 끈적끈적한 더위 속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도 조금씩 말라 간다. 와중에 두 편의 영화가 코로나로 숨 죽은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무당이 악령과 싸우는 오컬트물 <랑종>과 강화 인간이 악당을 응징하는 액션물 <블랙 위도우>다. 장르도, 프로덕션 규모도, 목표 관객층도 다른 두 작품이지만 오늘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한자리에 놓고 보면 지금/여기의 비관을 달래줄 소소한 위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에게 폭력 가하는 ‘랑종’


<곡성>의 나홍진이 원안을 쓰고 제작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였던 <랑종>은 타이 이산 지방의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다. 한 다큐팀이 랑종(무당)에 관한 작품을 만들면서 이 지역에서 대대로 ‘바얀’ 신을 모시고 있는 랑종 님(사와니 우툼마)을 촬영하고 있다. 그러던 중 님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기이한 행동을 목격한다. 바얀 신이 밍으로 옮겨가는 것이라 판단한 다큐팀은 접신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을 밀착취재하기 시작하고, 밍은 점점 음란하고 흉포한 ‘짐승’이 되어간다.

곧 진실이 드러난다. 밍에게 들린 것은 생명을 돌보는 신 바얀이 아니라, 인간이 해친 모든 것들의 원혼이다. 노동자와 빈민, 개, 돼지, 지네… 밍의 몸속엔 이 모든 것이 얽혀 있다. 밍의 젊은 신체는 온갖 상스러운 것들, 불길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스며드는 텅 빈 그릇이다. 그 그릇이 쉽게 열릴 수 있었던 건 그가 남동생과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악령이 소녀의 몸을 강탈하는 엑소시즘 영화들의 장르관습이 그러하듯, <랑종>에서도 가부장제의 규범을 어긴 여성은 악귀 들린 ‘잡년’으로 낙인찍혀 괴물이 된다.

밍이 원혼들에게 잠식되어가는 동안, 님은 퇴마사와 함께 구마의식을 준비한다. 어떻게든 조카를 구하겠다는 님의 선한 의지와 어떻게든 인간을 짓이겨버리겠다는 비천한 것들의 악한 의지가 대결하면서 영화는 서서히 절정을 향해 고양된다. 이 싸움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미 <곡성>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나홍진의 영화세계에서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인간은 악한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의심이 님의 선한 의지를 꺾어버리는 순간, 영화는 완전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원안자 나홍진의 영화세계를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다.

물론 <랑종>에도 독창적인 순간이 있다. 반쫑 피산타나꾼(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타이의 무속신앙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곡성>과는 다른 음험함을 만들어냈다. 특히 영화에서 밍과 합체되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없는 것들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짓밟히고 버려진 추추원혼들이 매개자를 만나 파괴력을 얻고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빙의된 밍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엠시유) ‘인피니티 사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파시스트 생태주의자 타노스의 덜 우아하고 다소 국지적인 판본일지도 모른다. 타노스는 우주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인피니티 건틀릿을 찬 손가락을 튕겨 우주를 가득 채운 지적 생명체의 절반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인간이 초래한 팬데믹과 열돔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밍과 타노스의 분노는 일견 설득력 있다. 절멸하라, 너.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이여. 그러나 이런 반인간적인 태도가 대안이 될 순 없다. 타노스의 공명정대한 손가락과 달리, 현실에서 재난은 약한 고리부터 타격하고, 고통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절멸의 상상력은 파국적 상황을 초래한 이들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다. 결국 이것이 <랑종>이 빠진 함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인간이 해친 것들의 고통을 상상하지만, 정작 스스로도 그 작은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타이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노동자와 빈민들이 착취당했던 이산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자본가였던 밍의 부계 조상들의 업보”라는 수사로 뭉개버리면서, 영화는 여성 신체와 비인간 동물은 물론, 이산 지역 역시 문명 이전의 원초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 안에서 착취한다.

‘블랙 위도우’, 작은 것들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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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위도우>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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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랑종>에 대한 고민은 <블랙 위도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 블랙 위도우(스칼릿 조핸슨)는 이미 2년 전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사망했다. 그는 타노스가 날려버린 우주의 절반을 되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이미 죽은 블랙 위도우를 솔로 시리즈로 잠시나마 되살릴 수 있었던 건 페미니즘 제4물결과 함께 할리우드를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페미니스트 상상력 덕분이었다. <블랙 위도우>의 배우이자 제작자인 스칼릿 조핸슨은 엠시유가 블랙 위도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해왔던 역사를 비판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사와 이미지의 탄생을 알렸다.

그렇게 부활한 블랙 위도우는 타노스가 그려놓은 파국의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린 나이에 구소련의 테러집단인 ‘레드룸’에 납치당해 세뇌와 가혹한 훈련 과정을 거쳐 킬러로 성장한 수많은 위도우를 해방시킨다. ‘작은 것들’의 봉기가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케이트 쇼틀랜드 감독은 이 작품에서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일’을 비판하되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파국적 상황 속에서도 ‘생존’을 말하는 용기로 이어진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페미니스트 상상력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섣부른 낙관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블랙 위도우는 지금, 무덤 속에 누워 있으니까. 다만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고, 나의 노력의 시간이 다했을 땐, 나의 동료들이 이어서 노력할 것이라고. 사실 <랑종>의 님은 스스로의 힘을 의심하면서도 밍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자 했었다. 영화 속 페이크 다큐가 그 분투를 기억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게 사실 현실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게 사실, 더 무섭고, 그러나 더 힘이 되지 않는가.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 손희정 영화평론가가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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