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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특별법 제정] ③ '시신도 못 찾고 73년'…유족의 한 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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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죄없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빨갱이 가족' 낙인에 침묵

"국가 차원 공식 사과하면 화합 분위기 조성될 것"

(여수=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죄없이 죽은 것도 억울한디 시신도 없당께."(여순 10·19 증언록 일부)

순천대 여순연구소가 지난해 발간한 10·19 증언록에는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의 서글픈 역사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연합뉴스

73년만에 받은 '무죄'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24일 전남 순천시 왕조동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희생된 민간인 9명의 유족들이 73년만에 재판부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고 기뻐하고 있다. 순천지원 제1형사부(송백현 부장판사)는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철도원으로 근무했던 김영기(당시 23) 씨와 대전형무소에서 숨진 농민 김운경(당시 23) 씨 등 민간인 희생자 9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21.6.24 minu21@yna.co.kr


침묵을 지키던 유족들이 70년 만에 꺼낸 그 날의 기억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펼쳐졌다.

순천시 황전면 발산마을에 사는 오영순(88) 씨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잃었다.

오씨의 아버지 오인태(당시 30세) 씨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직후 지서에서 나온 경찰에게 잡혀간 후 목포형무소에 이감돼 6·25전쟁 직후 총살됐지만, 시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씨의 이웃인 정성례(72) 씨도 시아버지를 잃었다.

시아버지 역시 목포형무소에 끌려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70년이 넘도록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증언록에는 오씨나 정씨처럼 영문도 모른 채 가족을 잃고,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으로 찍혀 고통의 세월을 보낸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증언에 나선 유족들은 한결같이 특별법이 제정돼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기를 바랐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순천역 철도원 김영기(당시 23) 씨의 아들 규찬씨는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해드리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며 "여순항쟁 민간인 희생자가 너무 많은데 국가가 치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여순사건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
(서울=연합뉴스) 류영석 기자 =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여순항쟁서울유족회 관계자 등이 여순사건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1.2.22 ondol@yna.co.kr


73년 만에 여순사건특별법은 제정됐지만,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희생자 유족들이 숨을 거두거나 생존한 유족들도 80∼90대의 고령이어서 진상 조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방부와 검찰, 국정원, 외교부, 지자체 등 국가기관이 보관 중인 여순사건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것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규종(75) 여순항쟁유족회장은 "수많은 유족이 연로하셔서 한을 안고 죽어가고 있다"며 "여순사건 특별법이 좀 더 빨리 제정돼 아픈 마음을 달랬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어 "유족들은 당시에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며 "국가가 공권력에 의한 잘못된 사건이라고 정식으로 사과하면 화합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minu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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