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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외로움은 꽃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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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는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만 한데 모아놓은 방이 있습니다. 2년 전 출장 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는데, 보고 싶은 작품은 많고 관람시간은 촉박한데도, 사면에 로스코 그림을 걸어놓은 그 공간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이 작가는 사각의 캔버스를 오로지 한두 가지 색(色)으로만 채우는 추상표현주의 화가입니다. ‘나도 그리겠다’ 할 만큼 단순한 색면화인데, 그 오묘한 색의 대비와 불분명한 경계, 일렁이는 굴절을 바라보고 있으면 ‘색의 침묵’이 주는 강렬함에 속수무책 빨려들게 됩니다.

실제로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험으로 다가가길 원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로지 근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비극, 황홀, 운명 같은 것. 내 그림을 보고 감정을 터뜨려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이 바로 내가 그림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텍사스 휴스턴에는 로스코 그림들로만 벽면을 채운 예배당 형태의 ‘로스코 채플’이 있어서 명상과 치유의 공간으로 사랑받는다고 합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를 다시 떠올린 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단색화 거장 ‘정상화’ 전시에서입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한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로스코의 극단적 예술세계와는 결이 전혀 다르지만, 단 하나의 색면으로 승부를 건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습니다.

특히 몇 차례 붓질이 아니라 색이 마르면 뜯어내고 새 물감으로 다시 메우기를 반복해 균열과 복원의 흔적을 뚜렷이 보여주는 정상화 작품은 로스코와는 또다른 감동을 안깁니다. 상처 난 곳에 새 살이 돋고 굳은살이 박이는 우리 인생을 닮아서일까요. 겉으론 한가지 색이지만 화면을 뜯으면 최소 4~16가지 색이 중첩돼 우러나는 색이기도 합니다. “그냥 흰색이 아니라 삼베옷이 오래돼 땀에 젖어가지고 쩔면 나오는 그 빛”, “아궁이에 나무를 지폈을 때 내는 그 잿빛”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작가의 집념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지지요.

10대에 6·25를 겪은 정상화는 자신의 작업을 “전쟁 속에 폐허가 된 나의 내면, 그러나 파괴를 극복한 승화”의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90세에도 조수 없이 홀로 노동하는 그는 “이것이 내 일상이자 예술. 난 그저 평범한 늙은이”라고 하더군요. 누군가 “힘들지 않느냐, 외롭지 않느냐” 묻자 그가 말합니다. “고독은 예술가에게 꽃과 같은 것.”

울고 싶은 날, 외로움에 몸서리 쳐지는 날 정상화가 빚어낸 ‘침묵의 벽’ 앞에 서보시길 바랍니다.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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