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382] 초록색 벽의 치명적 유혹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수 놓는 여인, 1817년, 목판에 유채, 47.5x36.3㎝,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한 여인이 수를 놓는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금발 머리와 수틀 위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주인은 화가 루이즈 자이들러. 그녀는 친구였던 독일 초상화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Georg Friedrich Kersting·1785~1847)의 여러 그림에 모델이 돼주었다. 그녀의 팔을 따라 흐르듯 주름진 옷소매는 창문에 걸려있는 커튼 주름과 호응하고, 단순하되 밋밋하지 않은 곡선의 의자와 테이블은 가녀리면서도 흔들림 없이 작업에 집중하는 여인의 우아한 몸놀림을 닮았다. 케르스팅의 실내 풍경은 이처럼 인물화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평범한 일상의 작업마저도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무대장치 같다.

모든 세부가 사진처럼 명료한데도 숨을 멈추고 빠져들게 되는 이 방의 신비로운 공기는 초봄의 숲을 닮은 초록색 벽에서 뿜어져 나온다. 18세기 말, 산업화 및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유럽 대도시에서는 실내를 이처럼 초록색으로 장식하는 게 큰 유행이었다. 마침 스웨덴 화학자 셸레가 발명한 바로 이 초록색, ‘셸레 그린’은 뿌연 하늘과 잿빛 건물에 짓눌린 도시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실내 디자인뿐 아니라 각종 의류와 장신구에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문제는 셸레 그린의 주성분이 비소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방에서는 숨을 크게 쉬어도 위험했던 것. 셸레 그린은 중독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다음에야 퇴출당했다. 이토록 평온하고 아름다운 케르스팅의 그림은 지금도 미술책이 아니라 독성 안료의 역사에 더 자주 등장한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