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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일정 기습 변경 후 '각하', 강제징용 유족들 "이런 희한한 재판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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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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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씨(왼쪽)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장이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16개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후 심각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박민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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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들이 서울중앙지법 서관 출입문으로 빠져나왔다.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 정의구현 전국연합회장이 기자들 앞에서 분통을 터트리며 발언을 했는데, 이를 옆에서 보던 머리가 희끗한 한 유족은 계속 혀를 찼다. “이런 희한한 재판은 난생 처음 봤네.” 다른 유족 국모씨(79)도 황당해 했다. “재판 한 시간 반 전에 (일정이 바뀌었다는 걸) 듣고 의정부에서 왔어. 다른 데 갔다가. 허허.”

이날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재판장 김양호)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16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가 청구한 소를 각하한다. 소송비용은 원고들이 부담한다”고 판결했다. 각하는 소송이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끝내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이 길어서 결론만 말씀드리겠다”며 “개인청구권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되었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 없지만 소송으로 행사할 수는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날 선고는 원래 오는 10일 오후로 예정돼 있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유족들이 방청을 하러 올 작정이었다. 재판부는 이날 오전 갑자기 당일 오후로 선고 일정이 변경됐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소송 대리인 등을 통해 듣고 급하게 법원에 온 유족들은 몇 되지 않았는데, 1분쯤 걸린 선고를 듣고는 황망해했다.

재판부는 선고 후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이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하여 위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며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이를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고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결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하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 이유에 대해 “이 사건 손해배상 청구권은 헌법상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를 위하여 국내법적으로는 법률의 지위에 있는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그 소권이 제한되는 결과가 된다”고 밝혔다. 또 “(각하 판결은)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밝혔다.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르면)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날 선고는 2015년 5월 소장이 접수된 지 6년이 지나 나온 1심 결론이었다. 일본 기업들이 소송에 응하지 않아 지연돼다가 올해 3월 공시송달이 이뤄지면서 재개됐다. 지난달 28일 열린 첫 공판기일에서 재판부는 “이미 두 차례 대법원의 판단을 받았던 사건으로 법리가 다 정리됐다”며 오는 10일을 선고기일로 지정했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0월 30일 이춘식씨를 비롯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여 1인당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기업의 소송 대리인들은 “원고 측도 (사실관계에 대한) 주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거나 “대법원이 법리는 정리했을지 몰라도 이번 사건은 개별 사실관계에 대한 주장이 부실하다”며 추가 변론 기일 지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이 우리 재판부가 담당하는 사건들 중 가장 오래 됐다. 법률적 문제이고 (판결 선고까지) 오래 기다렸다”고 밝혔다. 이런 재판부의 강경한 모습에 유족들은 승소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지난 재판에선 재판부의 강경한 어조와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정말 마음 한편으로 기쁘기 그지 없고 편안했습니다.” 장덕환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그런데 오늘 당사자들에게 사전에 예고도 없이 이렇게 선고를 당겨서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선고를 미루는 일이 있어도 당사자 모르게 당겨서 하는 걸 이해할 수 없고 (선고 결과가) 한심스럽기 그지없고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는 유족들과 상의해 즉시 항소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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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고 임정규씨의 아들 임철호씨(앞쪽)와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장이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16개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소송에서 각하판결을 받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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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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