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복식조 4라운드 초대 작가는 홍이현숙(1958~)과 조은지(1973~)다. 이들은 페미니즘과 생태학 운동의 목표를 동일시하며, 자연과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점에서 에코페미니스트로 호명될 수 있다.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진화 과정, 특히 사회적 지배원리와 위계질서를 문제 삼고, 더불어 사는 공생적 삶의 방식을 통해 여성과 자연을 동시에 해방시키고자 한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두 작가의 작업은 두 가지 강조점이자 공통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
우선 자연·여성·동물을 하위체로 동일시하는 이분법적 위계에 맞서 삼자의 연대감과 합일을 지향하는 윤리적 예술을 수행함으로써 타자의 해방을 통한 여성의 해방을 모색하는 한편, 현대 에코페미니즘의 중요 이슈인 동물권 옹호에 합류한다. 다음으로 지금/여기의 한국, 넓게는 동남아시아의 전통·지역성·현실에 기반한 구체적 삶의 조건과 경험을 맥락화해 자생적 한국 에코페미니즘 미술의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홍이현숙 ‘석광사 근방’(2020, 싱글 채널 비디오, 스틸 이미지)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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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현숙의 ‘고래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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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현숙은 생태주의를 여성과 자연의 관계로부터 여성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으로 인식하며, 작업을 통해 가부장제도 내에서 훼손된 자연과 여성 주체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지난 30년간 지구환경, 사회현상, 젠더를 문제시하는 일관된 주제 의식으로 농축된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는 경력 초기부터 옷과 흙을 켜켜이 쌓아올린 텃밭 구조물 위에 보리싹을 틔우는 조각적 설치작업(1997~2003)을 선보이며 한국 화단의 대표적 에코아티스트로 정평을 얻었다.
홍이현숙 ‘은닉된 에너지’(1998, 설치, 보리씨앗, 흙, 헌 옷들, 가변크기)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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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여성 무용담의 연장선상에서 작가는 모계신화의 원형인 마고할미를 소환한다. 할미로 표상되는 거인 여신의 창세신화는 늙은 여자,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노파에 대한 가부장 시선을 맞받아치는 설욕의 알레고리로 독해할 수 있다. ‘마고할미의 DMZ 팬파이프’(2015)에서 작가는 의인화된 땅굴이자 자신의 분신인 마고할미를 거대한 손으로 땅굴을 파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등장시켜, DMZ 생태계가 손상되지 않은 채 지하로 연결되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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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자연의 관계에서 여성성을 재발견
훼손된 주체 회복
흰색 벽을 더럽혀
타자화된 흙을 해방시키는
환상적인 탈출기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 속에서
실현 가능한 미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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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 모두에서 작가는 “모래내시장 좌판에서 오천원 주고 샀다”는 파란색 꽃무늬 ‘냉장고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다. 이 원피스는 작가가 네 귀퉁이 방바닥을 몸 전체로 쓸며 돌고 도는 행위로 결코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을 풍자한 비디오 작품 ‘구르기’(2006)에서 처음 선보였다. 그로부터 작가가 퍼포먼스마다 입고 나오는 고유의 ‘코스프레’ 의상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꽃무늬 의상이 여성의 환상과 욕망의 메타포로서의 꽃의 함의와는 전혀 다른, “개발이나 근대화와 거리가 먼 변두리 여자,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중년 여자”를 표상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여자와 자연을 폄하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항의하듯, 스스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여자로 변신한다. 인류의 생태학적 범죄로부터 무고한 원시 자연, 태곳적 모계사회로 회귀하려는 것일까?
홍이현숙 ‘여덟마리 등대’(2020, 고래소리 사운드(13분1초), 스피커 8대, 320×252×180㎝ 설치물)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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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현숙의 생태학적 위기 의식이 동물로 확장된 것은, 인간을 동물의 주인으로 만든 인간예외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지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자자세’(2016)와 ‘고래자세’(2018)는 그러한 시각이 표출된 초기 사례들이다.
고래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만 아쿠아리움 연구소로부터 고래 8종의 소리 데이터를 구하는 행운을 작가에게 안겨주었다. 2020년 아르코미술관 개인전 ‘휭, 추-푸’가 그 결과물이다. 작가는 녹음된 고래들의 실제 목소리를 청취 가능한 음역대로 편집, 변환시켜 8대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앰비언트’ 사운드 설치작업을 발표했다. 고래의 의성어를 그대로 표기한 제목이 말하듯, 이 전시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구상의 또 다른 생명체를 느끼도록 권유한, 고래가 기거하는 심해로의 초대였다.
작가는 비인간 생명체와의 공생을 꿈꾸며 동물과의 합체를 위한 기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동물 되기를 시도한다. 재개발로 살 곳을 잃은 고양이들의 서식처가 된 ‘석광사 근방’(2020)에서 그는 여전히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채 고양이 자세를 흉내내며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거나 가파른 지붕을 타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한다. 동물적 범주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종 간의 비언어적 소통 방식으로 동물권을 재해석하는 도나 해러웨이에 공감하듯, 야생동물의 행태와 비언어적 표현법을 익히는 원초적 행동 훈련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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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지의 ‘흙의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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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지는 문명과 함께 가속화된 생태계의 파괴, 자본과 지식으로 그 파괴를 영속화시키는 후기산업사회의 역기능을 통감하며, 흙·땅·생물·생명의 재생을 꿈꾸는 시적이고 서사적인 작품으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엔트로피 남용으로 인한 지구적 재앙에 대한 작가의 예술적 개입은 “흙으로 돌아가기, 흙에서 다시 태어나기, 흙으로 살기”라는 지상명령으로 수행된다. 그것은 개발 이데올로기에 의해 타자화된 흙을 구하는, 흙의 ‘엑소더스(Exodus)’와 다름없다.
조은지 ‘진흙시_엑소더스’(2008, 진흙을 사용한 퍼포먼스 및 설치, 텍스트, 진흙, 프린트 발간물, 가변크기)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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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성사전시관 전시 출품작 ‘신도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다’는 신도시가 들어설 파주 지역의 진흙을 양동이로 날라와 전시장 하얀 벽면에 던지는 퍼포먼스였다. 부동산 개발 현장으로부터 흙을 해방시키려는 열망의 표현이자 앞으로 펼쳐질 흥미진진하고 환상적인 탈출기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이 작품은 제목이나 전시 장소가 암시하듯, 흙의 탈출과 여성의 해방을 유비시킨 점에서 에코페미니즘의 예시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흙의 엑소더스는 흙덩이를 전시장 벽면에 던지는 투척 행위로 자본화된 땅으로부터 흙을 해방시킨다는 일탈적 발상에서 나왔다. 작가가 의도하건 아니건 간에, 외부의 흙을 전시장 내부로 끌어들여 흰색의 벽면을 “더럽히는” 훼손 행위를 통해 모더니즘 전시 관행을 벗어난다는 상징성 역시 저항의 서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모반의 뉘앙스는 2008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진흙시_엑소더스’에서 더욱 고조된다. 양동이에 담은 흙 대신 육면체로 빚어놓은 흙덩이를 손으로 한 줌씩 뜯어내며 예의 퍼포먼스를 수행했는데, 미니멀리즘 입방체를 신체 행위로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신체미술의 층위가 더해지고, 결국 에코페미니즘이 행위미술, 신체미술과 만나는 지점에서 중층적 반모더니즘 의미를 발생시킨 것이다.
‘흙도둑(Earth Thief)’(2009)에서는 베를린 분단선을 넘나들며 비닐봉지에 흙을 담고 다시 흘리기를 반복하는 상징적이면서도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 경계지우기 제식을 수행했다. ‘부동산박스빈선감도’(2010)는 부동산 개발로 텅 빈 박스형 건물들이 방치되어 있는 삭막한 안산 선감도의 낯선 풍경을 노래로 달랜 뮤직 퍼포먼스였다. ‘떨어지는 계란’(2016)은 계란처럼 낙하하는 흙덩이로부터 세월호 희생자의 재앙적 이미지를 암시받으며 흙과 몸, 흙과 생명의 관계를 시사한 흙의 퍼포먼스였다. 2011·2012년 한국과 독일 개인전 발표작 ‘땅, 흙이 말했다’와 2019년 일민미술관 출품작 ‘땅땅땅, 흙이 말했다’ 역시 진흙덩이가 벽면을 때리는 땅땅땅 소리, 투척하는 저항적 몸짓과 가쁜 숨소리로 흙의 발언을 대신하는 동시에 땅의 고통을 공명시켰다. 이 일련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흙을 탈출시키는 흙의 공모자, “최후의 합창가”를 부르는 엑소더스 투사로서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위임했다.
조은지 ‘개농장 콘서트’(2004~2005, 퍼포먼스, 포스터)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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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엑소더스는 인간중심주의의 또 다른 희생양, 동물의 엑소더스로 이행된다. 2018년 ‘봄을 위한 목욕’은 작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농장에서 치러진 소 목욕 제식에 참여해 손수 물호스와 브러시로 소의 외피를 닦는 장면을 담은 싱글채널 비디오다. 살떨리는 긴장감과 경외심으로 동물 몸을 씻기는 작가의 경건한 모습에서 인류를 대신해 비인간적 폭력을 사죄하는 씻김굿, 또는 고해성사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조은지는 이미 2004~2005년 일산 일대 개농장에 갇힌 식용 개들을 연민하며,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나누듯 노래 ‘백만송이 장미’를 불렀다. 이 ‘개농장 콘서트’는 개념적 동물권 옹호를 넘어 실제로 동물과 거리를 없애고 관계맺기를 시도한 섬세하고 부드러운 퍼포먼스였다.
작가의 동물과의 연대 의식은 2018~2020년 사이 진행한 문어 연작에서도 감지된다. 이 중 ‘문어어문(文魚魚文)’(2018)은 문어가 내뿜는 먹물을 글월 문(文)과 연결지어 문어로 호칭한 고증을 참고해, 먹물로 책장의 글자를 지운, 즉 문어의 언어로 인간의 언어를 덮어쓴 수행적 드로잉이었다. “새로운 존재 양태의 언어 출현”을 상상하는 이 작품에서 작가의 문명비판 의식이 돋보인다.
조은지는 흙, 동물에 이어 인간의 엑소더스를 위한 역사적 공모작업을 수행했다. 2017년 아트스페이스 풀의 개인전 ‘열, 풍’에 전시된 ‘수행하는 사람들’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발발한 학살과 1970년대 캄보디아 킬링필드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영상으로 기록한 2채널 비디오이다. 죽음의 극한상황을 이겨낸 생존자들은 여성합창단을 결성하여 당시의 억압적 상황을 아름다운 서사로 노래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동시에 후대에게 역사의 진상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피억압자, 소수자, 사회적 하위주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음성을 상실한 자들에게 음성을 되돌려주고자 한다. 따뜻한 체온(열)과 에너지(풍)로 그들을 부활시킨 이 작업에서 타자의 해방을 통한 여성 해방이라는 생태학적 비전이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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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현숙과 조은지의 에코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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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사회 전반에 걸친 불안전성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사회의 변화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의 변화이다. 홍이현숙과 조은지는 자연이 인간 존재를 자라게 하는 생태정원이며, 자연·인간·동물은 다른 종들과의 상호의존성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생태학적 변화를 시도한다.
자연 남용, 여성과 동물 비하, 자원의 불평등 분배가 인류세를 초래했다는 생태학적 정설에 공감하며 이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실현 가능한 미래의 세계를 전망한다. 두 작가는 강건한 페미니즘 정신과 투철한 생태주의 가치관으로 무장된 액티비스트들이자, 예리한 통찰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텍스트를 쓰고 시를 짓는 탁월한 문사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찬 이들의 발언으로 뒷받침된다. 홍이현숙은 비정치적 행동으로 정치적 의미를 확보하는 자신의 예술을 “예술적 상상력을 엔진으로… 존재의 비약을 감행하고… 그러한 감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주류의 존재에서 탈중심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조은지는 “내가 일관적으로 견지해오는 태도는 타자와 나의 동질성에 대한 가능성의 실험과 수행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연스럽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은 나에게 생존에 관련된 일”이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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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큐레이터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 관장 등을 거쳐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카셀도큐멘타14 감독선정위원·광주비엔날레 총감독·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다수의 페미니즘 미술전과 백남준·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여성과 미술> <굿모닝 미스터 백>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산다> 등이 있다. 김세중상(저작출판), 석주미술상(평론),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등을 수상했다.
이번에는 김수자(64)와 함경아(55)를 소개한다. 이들 작품은 여성성이라는 화두를 명시하지 않지만 페미니즘으로 읽어낼 수 있는 중대한 요소를 공유한다. 천·바느질·자수 같은 매체를 사용하고 인류학적 관심으로 유목민적 여행을 수행하면서 여성적 화자를 드러나게 한다. https://t.co/JYktPu3mBh
— 플랫 (@flatflat38) April 16, 2021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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