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전주박물관, 학술도서 '후백제와 견훤' 발간
견훤이 세운 성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동고산성 출토 기와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통일신라시대 말기 왕권이 약화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자 후백제 왕이 된 견훤(867∼936). 그는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내걸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으나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패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18일 출간 사실을 알린 학술도서 '후백제와 견훤'에서 김갑동 대전대 교수는 견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유로 지나친 무력 신봉과 개혁의지 부족을 꼽았다.
김 교수는 "견훤의 군대는 훈련을 받은 공식적인 정예병이었고, 그는 힘이 있으면 다 굴복할 것이라고 믿었다"며 "이에 자만한 견훤이 신라 수도를 침범해 왕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후 왕을 죽인 역적으로 치부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견훤이 신라의 군대 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정치·사회 체계도 수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장자인 신검을 제쳐두고 젊은 후비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한 사실도 패착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후삼국 성립은 우리나라가 분열에서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잠시의 몸부림이었다"며 "견훤은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백성의 열망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전주시, 장수군,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가 국립전주박물관과 함께 발간한 책에는 후백제를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관점으로 조명한 다양한 논문이 실렸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견훤(甄萱)의 성을 '견'으로 읽을 근거가 부족하며, 조선시대 역사서를 보면 '진'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견훤이 태어난 곳은 상주가 아니라 오늘날 문경시 가은읍이라고 설명했다.
조명일 군산대 초빙교수는 전북 지역에 남은 후백제 산성을 소개했다. 그는 "직사각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돌, 네모난 집수(集水 )시설, 특이한 형태의 기와, 초기 청자 발견이 후백제 산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진정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국보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 대해 기단부 구성과 지붕돌 수법, 탑에서 나온 불상 등을 근거로 후백제 작품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진 실장은 "왕궁리 석탑은 후백제가 백제 계승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문경·상주 일대 석탑 기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궁리 강당 터에서 발견된 '대관관사'(大官官寺) 글씨 기와는 '대관'(大官)과 '관사'(官寺)를 따로 읽어야 한다고 봤다.
이어 '대관'은 후백제가 전주로 천도하기 전까지 수도로 삼은 곳으로 추정되는 광주 무진고성에서도 확인되는 점으로 미뤄 왕궁리 절터는 후백제의 중요 거점이자 후백제 왕실 직할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학술도서 '후백제와 견훤' |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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