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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어디서든 성별 없는 존재의 사랑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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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31. 사랑의 쓸모

사랑을 말할 땐 사랑만 말하자

자꾸 몸에 대해 말하지 말고

엄격한 조건·자격 따지지 말고

마음 담긴 꽃다발 받은 마흔살

내 사랑 ‘비정상’ 참 다행이다

어떤 사랑이든 공감하고 위로하는

모두에게 열린 사랑 말하는 사회면

나는, 내 삶은 좀더 자유로웠을까


한겨레

2015년 10월4일 소풍으로 통도사에 놀러 갔을 때를 2017년에 그리다. 그림 박조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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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해 말하려면, 사랑에 관해서만 말해야 한다. 사랑을 말하는 일이 사랑 말고 다른 것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사랑에 관해 말해야 하는 인간의 책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우리가 품었던 사랑의 말이 사라지거나 소멸된 것일 리 없다.

이방인도 아닌데 이방인처럼 이 사회 바깥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따금 사랑을 묻고 싶어진다. 성소수자의 사랑은 항상 너무 많이 깎여나가고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음란함으로 치환되어 보인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사랑에 관해서만 말하려 한다. 나와 그들을 가르고 쓸모와 효용을 따져,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나누는 일 말고,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쯤 적어보려 한다. 어느새 쉰을 넘겼으니까 이제 조금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났다.

열한살의 떨림을 기억한다


내 사랑의 첫 기억은, ‘북소리’였다. 열한살 때였다. 나는 마음속 말도 제대로 꺼낼 줄 모르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타고난 것들이 다른 아이들과 달라 항상 도드라지니 나는 언제나 숨어 있어야 했는데, 한 아이 앞에서 내 작은 몸이 큰 소리를 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여러가지 사랑에 관한 자극들이 온 사방에서 흘러들어와, 내 사랑이 무언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언가, 이른 나이에 사랑을 고민하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럴 수 없었다. 기껏해야 흙을 파헤치며 놀고 ‘컬러티브이’가 들어온 집에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환호성을 지르며 구경하던 때였으니, 아무도 사랑 같은 것에 관해 말할 줄 몰랐다. 교복 입은 중·고등학생들이 시집 속에서나 얼굴 빨개지며 몰래 읽었을까, 사랑은 ‘애들은 몰라도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나는 열한살의 내 온몸을 쾅쾅 울리던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상대가 같은 반 남자아이였으니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이상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열한살의 나는 그 북소리처럼 울리던 마음이 이상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 아이의 얼굴 도장이 새겨져 단 한순간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무섭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뭐지, 싫지 않은 이 마음은 왜 이렇게 무겁지, 내내 불편했던 몸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 겁에 질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쳤던 내 사랑이 흘러간 곳에서 마주한 나의 남성 신체는 그래서 더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사랑이 성별과는 관계없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생리란 사실이 해답이 되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내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사랑과 나의 신체는 하나가 아니었고, 나는 그걸 한 몸 안에서 겪어야 했다.

남자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사랑은 사랑대로 키를 키웠는데, 남성의 몸 역시 다른 쪽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십대 시절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나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자신의 싸움이었다. 사랑을 느끼는 북소리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남성의 생리 사이의 시끄러운 결투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해의 욕망 또한 커져갔고, 그 싸움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사랑 없는 몸이거나 몸 없는 사랑이어야 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몸이었다면 오히려 내 사랑은 쉬웠을까, 나는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끔찍한 것을 매 순간 한 몸 안에서 동시에 맞닥뜨려야 했다.

하루하루 피로함의 연속이었고, 쓰러진 몸은 항상 남성의 것이었으니 나는 단 한 번도 승리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패배했다. 다른 사람에겐 하룻밤 열병처럼 지독히 앓는 것이 당연한 그 환절기는, 나에겐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전쟁터였다. 매번 지고 마는 전쟁터였다. 지는 줄 알면서 다시 또 북소리에 이끌려 나서야 하는, 지독하고 끈질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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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모습을 인형으로, 서로 그리고 만들었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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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사랑에 모든 걸 걸곤 했지


꽃다운 나이, 스무살이 되었다. 사랑 앞에 선 스무살 나는 갑옷을 두른 채였다. 가면을 쓰고서라도 살아남고 싶었던 나는 사랑을 비관하며 제일 형편없는 의미를 움켜쥐었다.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헤매게 하지 않으며, 최소한 쓰러진 나를 마주할 필요 없이 아예 나 자신을 지워버린 채 사랑 앞에 섰다. 누구도 마주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혼자만 아는 그 따위 사랑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어차피 피폐해 버린 이 사회의 사랑을 가리키며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저들에게도 추하고 더러운 것이 사랑이니, 나 자신 역시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비굴하고 무책임한 것이 원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랑의 본모습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사랑 없는 모든 사람이 궁지에 몰리는 건 아니겠지만, 존재의 흉터가 되고 만 내 사랑은 그렇게 내 삶을 나락으로 떠밀었다. 사랑을 지우고 나니, 아무것도 좋아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떤 소리도 들으려 하지 않는, 텅 빈 내가 되었다.

이따금 그때 내가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나는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혼자서는 알 수 없는 게 사랑이니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줄 수 있는 누군가 나타났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일이지 싸우는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누구에게도, 가족에게까지도 사랑받지 못한 삶이라 그랬는지 어쩜 그렇게 지독히도 사랑을 그리워했는지. 가능하지 않은 사랑에 모든 걸 걸곤 했는지.

‘남자’라는 가면을 쓴 채 다시 또 북소리를 따라 누군가에게 이끌리게 되면서, 여러 해 마음속으로만 그를 그리워하는 나를 알게 되면서, 나는 자주 허망하게 웃었다. 도대체 나에게 뭘 어쩌라는 말인 거지, 아 참 삶이란 거 쓸모없네. 나는 아마도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리워할 수 없고 누구의 그리움도 되지 못하는 이십대의 나는 내가 받아 든 남루한 삶의 쓸모를 헤아리고 있었다. 요즘엔 사랑 때문에 삶의 의미까지 되짚어보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하필 나는 그렇게 허약한 사람이었다. 내 사랑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와 묶여 있으니 매 순간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어디서든 성별 없는 존재의 사랑에 관해 말하고, 누구의 사랑이든 공감하고 위로하는 마음들을 마주할 수 있는 사회라면 어땠을까,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30년 전의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모두에게 열린 사랑을 말하고, 사랑의 너른 품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사회였다면 나는 좀 더 자유로웠을까, 최소한 내 사랑을 누군가에게 토로할 기회라도 있었을까? 모든 생이 그러하듯 지나고 나서야 나는 서툴던 내 사랑의 풍경을 되짚어본다.

‘몸’에만 사랑을 말하던 그들


비로소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몸으로 수술을 받은 건, 서른한살. 수술을 받았으니, 이제 사랑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조금 더 비관적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쳤던 내 사랑은 단 한 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으면서 수술로 만들어진 몸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란 도대체 얼마나 진심인 걸까, 나는 내가 원하던 사랑으로부터 더 멀찌감치 물러났던 것 같다.

이미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겼고 혼자서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면서, 이제야 사랑은 다른 사람들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되었다. 비로소 평등한 존재로 (최소한 겉모습만으로라도) 사랑 앞에 서고 나니, 조금 어깨가 펴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동등한 사랑을 누린다는 건 이런 기분인 모양이구나, 나는 이제야 내 사랑을 말할 수 있었고, 내 사랑의 진심을 말할 수 있었다. 이 사회가 자기들끼리만 주고받던 사랑이란 말의 소통에 (최소한 겉모습만으로라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 관한 똑같은 이야기를 쳇바퀴 돌듯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며 탐닉하는 이 사회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훨씬 더 ‘머어얼리’ 사랑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다. 뭐,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내가 아니라 수술한 내 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더 ‘머어어어얼리’ 물러났다.

그중에 한 사람, 혹시나 내가 믿고 있던 사랑에 진심인가 싶은 한 사람을 만났을 때, 까마득히 잊고 있던 북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걸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열한살의 나로 돌아가 문득 얼굴이 붉어지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꿈이 ‘아들과 목욕탕에 가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릿속에 떠오른 북소리를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배를 두드리고 허리를 여러 번 접어 깔깔대면서, 이 나이 먹도록 다시 또 속고 만 어리석은 나를 향해 배 속에서 끌어올린 야유를 퍼부어주었다. 거기 여전히 부끄러운 얼굴로 숨어 있던 내 사랑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어주었다.

그때 그 사람은 아들과 목욕탕에 가고 싶다던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몸’에만 사랑을 말하던 그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몸을 쫓아다닐까? 아들을 꿈꾸던 그 사랑도, ‘몸’을 쫓아다니던 그 사랑도 비난할 마음은 없다. 인간의 사랑이 원래 그런 거라면 더 큰 꿈을 꾸었던 내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뿐 그들의 사랑에는 죄가 없는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살고, 다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비로소 ‘보통’의 내가 된 나는 보통의 사랑에 만족해야 하는 건지도. ‘사랑, 참 쓸모없네.’ 나는 다시 또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겨레

햇살 좋은 날 발코니에 나란히 앉아 찍은 최근 사진.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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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토록 많은 조건과 자격 들이미나


꽃이 참 쓸모없단 걸 아는데, 꽃을 받고 싶던 때가 있었다. 남자고등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반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꽃 한 송이를 선물해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고, 그래서 꽃 한 송이를 받았다. 튤립이었다고 나는 기억하는데, 채 피지도 않은 꽃송이를 제대로 버티지도 못해 허리를 구부린 그 한 송이 꽃을 들고서 나는 조금 설렜던 것도 같다. 아닌가, 받고 보니 어떤 마음도 없는 꽃이란 게 얼마나 아무 의미 없는지 알게 되어 내내 짜증스러워했던가?

사랑의 마음이 담긴 꽃을 내게 준 사람은, 지금 내 곁에 함께 사는 이 사람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마흔이 넘어서였다. 어느새 만난 지 10년이 넘어가는 요즘에는 받지 못했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신랑은 불쑥 꽃다발을 들고 현관에 나타났다.

뭐 근사하게 사랑의 말을 되뇌거나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오다 주웠다’에 가까운 투박한 꽃다발 증정식이지만, 그 꽃다발을 품에 안으며 나는 많은 걸 떠올린다. 호들갑을 떨며 환호하고, 우리 신랑 최고라고 엄지를 들어 올리면서, 나는 사랑 없던 지난 시간을 생각한다. 내 사랑은 분명히 내 안에 있었지만 거기 바깥에 나를 위한 사랑이 없어, 궁지에 몰리고 자학하고 자해하던 때. 삶의 쓸모까지 남루해져 고개만 떨군 채 발끝만 보고 버텨야 하던 때.

결혼을 안 한다, 출산율이 떨어진다, 젊은 사람들을 닦달하듯 몰아치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데, 나는 우리 사회에 그럴 자격이 있나 돌아보게 된다. 자연스러운 게 사랑이고, 서로를 위하고 지키는 게 사랑이라면서, 왜 항상 사랑 앞에 그토록 많은 조건과 자격을 들이밀어왔는지. 사랑을 말하지 않고 사랑을 말했다고 믿으면서, ‘정상적인 사랑’이란 말에 온 사회가 목을 매면서, 사랑 없는 삶을 안정된 미래라고 강요하고 있는지.

내 사랑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꽤나 지독했지만, 나는 실오라기 같던 내 사랑을 놓지 않은 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리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내 사랑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이번 생, 고마운 사랑이었다.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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