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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사랑받지 못한 자의, 더 커다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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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차 얻지 못한 이들의 유쾌한 패자부활전이 바로 문학

‘모든 존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 증명한 바리데기


한겨레

<꽃을 든 바리공주>, 작자 미상, 18세기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운경재단 소장품)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31) ‘바리데기 신화’, 그칠 줄 모르는 영감의 샘물

바리데기, 평강공주, 박씨부인 등 수많은 이야기 속 옛 여성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이 철저히 ‘이름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바리데기는 한 아이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그저 ‘버려진 존재’를 뜻하는 보통명사다. 평강공주는 평강왕의 딸이라는 뜻일 뿐 진짜 이름을 알 수 없으며, 박씨부인 또한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두 번째 공통점. 그들은 잔인하게 버려지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투명인간처럼 스쳐 지나간다. 바리데기처럼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강공주처럼 아버지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박씨부인처럼 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세 번째 공통점. 그들은 버려지고 짓밟히고 사랑받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품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더 커다란 사랑’으로 보답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신들의 나에 대한 증오와 편견은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하지 않고, 자신을 구해주지 않은 세상을 오히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하는 존재들이다.

이름 없는 자들의 통쾌한 복수


이런 이야기들의 주인공은 모두 바리데기의 후예들이 아닐까. 바리데기의 후예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자들의 통쾌한 복수, 복수조차 넘어선 더 큰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이름조차 얻지 못한 자들, 사랑다운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 공동체 내부에 안전하게 속하지 못한 자들의 유쾌한 패자부활전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사유의 바다에서는 떠도는 자들, 추방당한 자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자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오직 이야기의 힘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이야기의 힘이 없었다면 그들의 빛나는 삶은 결코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바리데기 신화는 내 마음속에서 항상 언젠가는 꼭 닮고 싶은 이상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가 끝인가 싶을 때,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싶을 때마다 남몰래 꺼내 보는 이야기가 바로 바리데기 신화다. 바리데기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딸, 그러니까 공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리데기는 공주다운 삶은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미처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일 기회조차 없었다. ‘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으니까. 그녀의 이름 자체가 ‘버려진 존재’, 즉 허섭스레기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새기고 있으니.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버려진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 머나먼 서천서역국으로 치유의 꽃과 물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으니까. 서천서역국은 마치 하데스처럼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무시무시한 죽음의 장소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노부부가 바리데기를 데려다가 기르지만, 바리데기는 그들이 부모가 아님을 알고 자신의 정체성을 궁금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죽을병에 걸렸으니 네가 아버지를 구할 생명수와 꽃을 구해와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서천서역국으로 가는 길, 즉 죽음의 길 위에서 바리데기는 자신과 결혼해야 약초를 주겠다는 무장승의 청을 들어주고 아들까지 낳아준 뒤 마침내 귀한 약초와 물을 얻는다. 바리데기가 구해 온 물과 꽃으로 아버지의 병이 낫자, 아버지는 그제야 바리데기의 소중함을 깨닫고는 ‘나라의 절반을 떼어주겠다’고 하지만 바리데기는 거절한다. 바리데기는 죽음의 강을 건네주는 존재, 만신의 몸주가 되겠다고 한다. 만신의 몸주란 지상에서 고통받는 존재가 저세상으로 갈 때 그 아픔을 덜어주고 무사히 저승으로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이다. 바리데기는 인간으로서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공주라는 지위와 특권조차 포기하고,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자, 샤먼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렇듯 바리데기는 단지 효심의 아이콘이 아니며, 버려진 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다.

목숨을 건 도약은 자발적 선택이었다


바리데기 신화를 읽다 보면 그녀가 결코 순종적이거나 희생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통쾌함을 안겨준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언니들은 하나같이 서천서역국 같은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바리데기는 진정으로 궁금하여 왕께 묻는다. “아흔아홉 빗장 속에서 청사 흑사 이불에 진주 안석으로 귀하게 기른 여섯 형님네는 어찌 못 가나이까?” 공주로 귀하게 자란 언니들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그들은 어찌 당신을 구하러 가지 않느냐고 묻는 바리데기 앞에서, 생부 오구대왕은 할 말을 잃는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한 줄 알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했던 것이다.

바리데기의 슬기로움은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더욱 빛을 발한다. 바리데기의 최고 장점은 결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아니다. 효는 바리데기가 실천하는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바리데기는 단지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자기 운명의 가혹함을 이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나중에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자청하여 그들의 아픔을 보살피고, 마침내는 인간의 가장 커다란 두려움인 ‘죽음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존재가 되기 위한 목숨을 건 도약으로 나아간다. 그 모든 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결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사랑받거나 인정받기 위한 가여운 몸부림이 아니었다.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대왕은 자신이 버린 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재산과 지위로 딸을 회유하려는 심보는 어쩌면 그토록 이기적인가. 재산을 나눠준다고 해서, 국토의 절반을 떼어준다 해서, 아버지의 딸로 주저앉을 바리데기가 아니다. 오구대왕의 무대가 오직 왕권 중심의 국가 하나라면, 바리데기의 무대는 온 세상의 아프고 슬픈 사람들을 향해 뻗어나간다. 오구대왕은 철저히 남성중심적인 사고(아들이 아니면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와 좁은 영토관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신의 영토 내부, 특히 자신의 가족과 신하들밖에 알지 못하며, 정작 국왕의 그늘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가족과 신하들은 아무도 왕을 구하겠다며 나서지 않는다. 오구대왕의 ‘우리’라는 개념은 지극히 편협하고 배타적인 경계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리데기는 국가의 영토를 넘어, 빈부의 격차를 넘어, 온세상을 유랑하며, 마침내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뛰어넘으려 한다. 바리데기의 깊고 너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 한 목숨 살자고 오래전에 버린 딸을 다시 찾는 아버지’가 얼마나 옹졸하고 편협하게 보였을까. 하지만 바리데기는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결심을 말한다.

부모가 품기에 거대한 딸, 바리데기


“오냐, 나라 반을 주마. 국가 반을 주마”라고 뒤늦게 딸을 회유하는 국왕에게 바리데기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라 반도 싫고 국가 반도 싫고 만화궁도 싫습니다. 저는 어려서 살면서 풀벌레를 친구로 삼고 풀로다가 양식 삼고 뿌리로다 양식 삼고 나뭇잎으로다가 옷을 삼아 살았으니, 사람 죽어서 억만사천 지옥에 갇힐 적에 큰머리 단장 곱게 하고 극락세계 연화대로 보내주는 만신의 몸주가 되게 하여주나니다.”(‘노들제 바리공주’ 중에서) 어리석은 부모가 품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딸, 이 좁은 세상이 품어내기에는 너무도 눈부신 여인이 바로 바리데기였다.

바리데기, 평강공주, 박씨부인,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 속 옛 여성들의 네 번째 공통점. 그것은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오직 사랑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사랑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없는 사랑,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의 원한 없는 사랑이 나를 울린다. 사랑을 경험으로 배우지 못했으나 마음으로 깨친 사람들, 사랑을 물려받지 못했으나 사랑을 온 세상에 전염시키고 유전시키는 사람들의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인해, 아직 이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 당신이 만약 사랑받지 못하여 고통스럽다면, 바로 오늘, 지금부터 바리데기가 남긴 사랑의 씨앗을 마음속에 심어주기를. 원망과 슬픔으로 얼룩진 우리 가슴에 당장 오늘부터 뿌리내려 먼 훗날 온 세상에 울려퍼질 사랑의 이야기. 그것은 버려진 자의 슬픔을 뛰어넘은 사랑, 짓밟힌 자의 복수를 뛰어넘은 사랑, 마침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존재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찬란한 사랑이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을 때, 내 한 몸 편히 누일 자리가 없다고 느껴질 때,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저 눈부신 바리데기를 떠올리기를. 버려진 자에서 잠시 필요한 자로, 잠시 필요한 자에서 세상을 구하는 이로, 마침내 이 세상과 저세상의 건널 수 없는 간극마저 메워주는 찬란한 가교가 된 존재, 바리데기를. 사랑받지 못하여 그 저주받은 이름처럼 버려졌지만, 이름의 의미를 통쾌하게 배반하며 이름을 뛰어넘어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바꿔버린 존재. 저주를 피해 더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로 도망치지 않고, 그 모든 사랑받지 못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더 커다란 사랑으로 갚아버린 바리데기. 바리데기는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더 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칭얼거리지 않고,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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