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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언제나 젊고 유연했던 ‘한국 영화계의 존재’ 그 자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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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이춘연 씨네2000 대표를 추모하며

한겨레

2019년 울릉도를 찾은 이춘연 씨네2000 대표.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 제공


일흔살 노년의 문턱에 떠났지만

모두들 약관의 요절인듯 아까워해

함께 고민해주던 ‘마음의 정성’ 덕분


어려운 일 생기면 늘 찾아갔듯

“저세상에도 찾아갈테니 영면 마시라”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얘기 따위, 다 그냥 하는 얘기다. 죽으면 모두 잊힐 뿐이다. 기억의 편린으로 사라질 뿐이다. 에스엔에스(SNS)에 사진을 올리고 추억담을 늘어놓는 것도 며칠 지나면 시들해질 것이다. 그렇게 연기처럼 흩어질 것이다. 죽음을 예고하지 않았던 자, 죽어선 안 될 사람이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춘연(씨네2000 대표)은 그렇게 영화인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춘연의 죽음이 분하고 억울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생전에 행했던 수많은 일이 헛되이 과거사가 되는 것, 마치 남의 일인 양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춘연의 삶은 그렇게 치부돼선 안 될 일이다.

제작자 이춘연을 두고 영화계 맏형이니 혹은 큰 별이니 하는 것도 다 공치사일 뿐이다. 무엇보다 그것만큼 진부한 표현도 없다. 추억을 상투적으로 만드는 것만큼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일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춘연은 한국 영화계의 존재 자체였다. 큰형이니 맏형이니 불렸다는 것은 그의 연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늘 젊은 세대와 어울렸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오래전 한국 영화계가 보혁 갈등에 휩싸였던 때가 있었다. 우파 원로 영화인들이 젊은 세대들을 두고 ‘빨갱이’ 운운하자 홀연히 무대에 올라가 “내 나이도 60을 바라본다”며 “그럼에도 이렇게 젊은이 취급을 해줘서 감사드린다”고 너스레 떨었던 때가 떠오른다. 이춘연은 나이 60일 때도 젊었고, 이제 갓 70에 죽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약관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뜬 것마냥 슬퍼한다. 이춘연은 젊고자 했기 때문에 젊었던 것이 아니라, 사고와 행동 자체가 젊었기 때문에 젊었다. 영화계에서 그만큼 늙었지만 젊었고, 완고할 수 있음에도 극히 유연했던 영화인은 없었다.

이춘연은 늘 중재의 화신이었고, 협치의 근원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이빙벨> 사태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음에도 어찌어찌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이춘연의 역할이 컸다.

영화제의 일부 인사들이 치졸하게도 외면하거나 거리를 두려고 할 때 앞장서서 김동호 당시 부산영화제 이사장을 ‘아부지’라고 부르며 다녔다. 그건 ‘너희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보란 듯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누군가 누군가에게 얘기하기가 꺼려질 때, 사람들은 늘 이춘연을 찾았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초과한 제작비를 못 갚게 됐을 때도 그 유예의 중간자로 이춘연을 찾았다. 그건 그가 해결책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같이 고민하고 노력해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그런 정성의 마음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정성과 노력의 산물이며, 사람들 간의 끝없는 타협의 산물임을 가르쳐준 셈이다. 누군가를 칭찬하기보다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영화인들의 습성을 “어이! 그만해.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이라며 일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춘연이었다.

그가 가지 않는 영화 행사는 공인받지 못하는 것인 양 취급됐다. 그래서 다들 그를 ‘모시려고’ 애썼다. 그는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정한 목적성을 갖고는 더더욱 그의 마음을 흔들기 어려웠다. 행동 동기가 순수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한국 영화계를 위하는 일이어야만 그를 스스럼없게 일으켜 세웠다.

이춘연의 존재는 한국 영화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고, 또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무엇보다 어떤 스피릿(정신)과 정체성을 지녀야 하는가를 상징했다. 예컨대 그는 정지영 감독을 소개할 때, 삼행시를 이용해 “‘정’말 ‘지’루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며 좌중을 웃기는 식이었는데, 그건 정지영식의 영화가 지닌 시대적 가치와 그럼에도 영화 자체가 지녀야 할 대중주의적 목표를 동시에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한국 영화계의 촌철살인 그 자체였다.

한겨레

고 이춘연 씨네2000 대표 빈소.영화인장 장례준비위원회 제공


이제 우리는 이춘연을 잃었다. 한국 영화계는 당분간, 아니 꽤 긴 시간 좌초하고 표류할 것이다. 시대가 사람을 만들지만, 때론 한 사람이 시대를 좌지우지한다. 이춘연이 그랬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그 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이춘연이 없는 영화계는 상상하지 못하겠다던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영안실의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에스에프(SF·공상과학물)적이다.

그와 칸국제영화제에 같이 갔던 때가 생각난다. 그는 큰 몸을 비행기의 비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끼워 맞춘 채 열몇시간을 멀뚱멀뚱 보냈다. “안 심심하세요?”라고 물으면 “뭐가 여기서까지 그렇게 분주하냐”며 느긋해 했다. 이런저런 일들이 안 풀려 마음속에 태풍이 일던 그였다. 나는 그런 그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따라가려 해도 그렇게 될 수 없게, 그가 만든 셈이 됐다. 그는 죽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니, 아예 할 말이 없다. 벌써 그가 그립다.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진다. 부디 저 세상에서도 그렇게 웃어주시라. 나중에라도 그 웃음, 다시 들려주시라. 절대 영면하지 마시라. 우리가 다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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