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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최병준의 가타부타] 그냥, 좋은 밥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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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냥, 좋은 밥을 먹고 싶다.

경향신문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코로나19로 주말에도 대부분 집에 박혀 있다. TV를 켜면 여기저기 ‘먹방’. 주제가 음식이 아닌 프로그램도 ‘맛’ 코너가 따라붙는다. 남이 먹는 게 뭐가 그리 궁금할까 하다가도, 눈길을 거두지 못할 때가 많다. 그만큼 밥은 원초적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혁명 당시 법률가였던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미식예찬>에 쓴 이 말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인용되면서 음식에 관한 명언이 됐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맞다. 쇤하이머라는 과학자가 중질소를 이용한 쥐 실험에서 이를 확인했다. 추적이 가능하도록 표시를 한 중질소가 들어 있는 음식을 쥐에게 먹였더니, 3분의 1은 배설물로 배출됐다. 나머지는 쥐의 몸에 분산돼 있었다. 실험 기간 중 쥐의 몸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옛것을 밀어내듯이 우리가 먹은 밥이 몸이 됐다는 것이다. 후쿠오카 신이치는 이를 ‘동적평형’이라고 했다. 사람은 그가 먹는 밥이 맞다!

밥은 정치적이다.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무엇을 먹는가’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 채식주의자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육식보다 맛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제대로 움직일 공간도 없는 돼지우리나 닭장은 동물권을 생각하게 한다. 엄청나게 많은 메탄가스를 배출하는 소는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킨다. 채식주의자는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생태계를 위해 시민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밥은 사회적이다. 모든 사회는 밥의 나눔에서 시작됐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식량의 나눔은 생존의 필수요건이었다. 오늘 운좋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해도, 내일 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나 돼지를 잡았다 해도 혼자 다 먹을 수도 없고, 저장할 수도 없었다. 공동체를 위해 나누는 게 서로에게 득이 된다. 밥을 나눴던 수렵채집사회는 성평등사회였다. 사냥 기술은 남성이 뛰어났지만, 식량의 주공급원은 채집이었고 거기엔 남녀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성평등사회였다.

인간만이 아니라 사회성 동물들도 음식을 나눈다. 흡혈박쥐도 피를 나누며 공생한다.

밥상은 가족과 동료의 경계를 상징한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인들도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신의 자녀가 된다.

좋은 음식을 보면, 사람들은 그립고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가수 나훈아는 홍시를 보며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부모는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혼밥’ ‘혼술’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요즘처럼 전시된 적은 없었다. 이해도 된다. 현대인들은 바쁘다. 업무로 바쁘든 취미로 바쁘든 아무튼 바쁘다. 자신의 몸이 있는 공간만이 생활공간이 아닌 지 오래됐다. ‘본캐’(본캐릭터)로 뛰어야 하고, ‘부캐’(부캐릭터)도 안 만들면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는단다. 유니버스 하나로 모자라 메타버스에서도 시간을 쏟아야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살면서 다들 네트워크에 신경을 쓰지만, 관계성은 약해지고 있다. 기든스와 바우만에 따르면 관계는 헌신을 기초로 하는데, 네트워크는 자신의 ‘이해’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접속하고 있지만, 불편한 이웃들은 차단해버려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게 되는 이 시대를 ‘단속(斷續)사회’라고 했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살다보니, 자아도 분열되기 십상이다. 지도로 표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도 결국 지치고 허기진 세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혼밥’은 두 개, 세 개의 몸을 부려야 하는 지친 사람들이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밥이라도 잘 차려 먹을 때 스스로에게 존중감을 준다.

자동인형이 튀어나오는 시계들이 발명되던 시대에 살았던 데카르트는 마음과 몸을 떼내어 생각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 세상은 분리할 수 없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다. 거기에 진짜 세상과 삶이 있다. 밥이 영혼을 지킨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많이 지쳤다. 코로나 잠잠해지면 그냥, 고마운 사람과 좋은 밥을 먹고 싶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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