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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정재의 시시각각] 살아 있는 경제 관료의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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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호 신드롬’의 그 변양호가

쓰는 얘기만 하는 정치에 물었다

누가 독이 든 성배를 마실 것인가

중앙일보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치 과잉의 시대라지만 그렇다고 과연 모든 정책 결정이 오로지 정치인의 몫일까.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진작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의 대표작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마지막 구절, 아마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일 것이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들은 옳건 그르건 통상 이해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이 아이디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어떤 지적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인 경우가 많다.”

최근 5명의 전직 경제 관료가 의기투합해 책 한 권을 냈는데, 장안의 화제다. 『경제정책 어젠다 2022』. 10개월 남은 대선을 앞두고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 담론 대신 포퓰리즘만 외치는 대선주자들의 머릿속을 바꾸고 싶다는 의욕이 행간에 넘친다.

최고참이자 집필을 주도한 변양호(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는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면 ‘변양호 신드롬’이 자동 완성 단어로 뜨는 그 변양호다. 나랏일을 적극적으로 한 죄 아닌 죄로 그는 갖은 고초에 옥살이까지 한 뒤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한때 “다시는 나랏일에 ‘나’자도 꺼내지 않겠다”며 입을 닫았다. 경제부처 후배들이 복지부동을 최고 덕목으로 삼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런 그가 임종룡(전 금융위원장), 이석준(전 국무조정실장), 김낙회(전 관세청장), 최상목(전 기획재정부 1차관)을 다독여 책을 낸 것은 타고난 ‘애국 본능’과 몸에 밴 ‘적극 행정’을 빼곤 얘기할 수 없다. 책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변양호는 “경제는 벌고 쓰는 것이다. 쓰는 건 쉽지만 버는 건 훨씬 어렵다. 쓰는 얘기만 해선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했다. 방점은 크게 세 가지. 임종룡은 “버는 건 규제 완화와 공정 경쟁, 쓰는 건 부(負)의 소득세를 통해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룡은 이 셋을 하나라도 빠지면 굴러갈 수 없는 ‘세발자전거’에 비유했다.

이 책의 특징은 디테일이다. 탁상공론은 아예 없다. 할 얘기만 했다.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숫자와 대안이 있다. 예컨대 특히 화제가 된 ‘부의 소득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구상에서 출발한다. 일정 소득에 미달하는 사람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부자에게도 똑같이 돈을 주자는 이재명식 기본소득의 단점인 역진성을 피할 수 있고 비용도 훨씬 덜 든다. “부자에겐 세금, 빈자에겐 현금”이란 시대정신과도 맞는다. 대상은 3370만 명, 전체 인구의 67%다. 재원은 97조1000억원. 각종 공제를 축소하고 복지 예산을 통합해 구조조정하면 가능하다. 어느 예산을 얼마나 줄일지도 조목조목 따져놨다. 머리와 실전 경험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제대로 쓰이려면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4년 전에도 비슷한 책이 있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경제 철학의 전환』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친분도 두터운 그가 디테일을 담아 쓴 책이다. 케인스식 모델을 접고 슘페터식 혁신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구체적인 대안을 조목조목 내놨다. 많은 이가 무릎을 쳤다. 진보의 담론이 되기에 충분했다. 채택됐다면 부동산 정책 실패로 4년 뒤 대통령이 사과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대선 직전에 출간돼 공론화 시간이 없었던 데다 대통령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운명은 어떨까. 책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려면 재벌과 노조는 물론 복지 기득권을 설득하고 온갖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나라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엄청난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웬만한 정치인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필자 중 한 사람은 “독이 든 성배, 누가 감히 마시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관을 쥐려는 자, 때론 흔쾌히 독배를 들이킬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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