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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벽화 그리고 회의만 하는 도시재생?…기반시설 다지는 ‘재생 2.0’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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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노후 저층 주거지를 위한 ‘도시재생 2.0’을 묻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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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2013년 뉴타운지구 해제 후 도시재생선도지역으로 선정돼 2014~2017년 재생사업을 진행한 대표적인 저층 노후 주거지다. 2020년 8월 정부가 8·4 공급대책을 발표한 뒤 일부 주민들이 공공재개발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12월 한양도성 성곽에서 바라본 창신동 전경.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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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 재개발의 출구 전략으로
창신동에 도입된 도시재생 사업
주민들 체감 변화 무엇인지 의문

“벽화 그리고 회의만 한다.”

도시재생 정책을 비난할 때 흔히 오르내리는 말이다. 담벼락에 그림만 그려놓거나, 이웃 공동체를 다지겠다며 모임만 갖기 일쑤더라는 이야기다. 도시재생 당국자는 대개 “관이 벽화 사업을 주도한 적은 없다”고 항변한다. 누가 벽화를 그렸든, ‘도시재생=벽화 그리기’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은 주민들이 체감한 변화가 없다는 뜻이란 점은 분명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9년 7월 콜롬비아의 한 산동네에서 “삼양동에도 모노레일이나 엘리베이터를 놓고 벽화를 그리면 관광마을이 될 수 있다”며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을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벽화는 한 시대 도시재생의 접근법을 상징한다.

2000년대를 휩쓴 ‘뉴타운’의 출구 전략 성격으로 2013년 도시재생 사업을 도입했다. 이제는 바뀐 게 무엇인지 물을 때다. ‘도시재생 뉴딜’을 하겠다던 정부는 지금 재개발을 통한 공급 속도전을 되뇌인다. ‘공공’을 붙였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울시엔 오세훈 시장이 ‘스피드 주택공급’을 들고 돌아왔다. 공공재개발 바람이 이 틈을 파고들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그 대표적인 예다. 창신1·2·3동과 숭인1동은 2014년 도시재생선도지역 ‘1호’로 선정된 곳이다. 2007년 뉴타운사업지구로 지정됐다가 2013년 해제된 직후였다. 산기슭에 형성된 ‘달동네’이자, ‘미싱’과 ‘시다’로 상징되는 봉제공장 밀집지여서 관심을 크게 모았다. 지난해 8·4 공급대책에서 정부가 공공재개발을 제시하자 일부 주민들이 다시 공공재개발을 추진 중이다. 갈등이 재현될 조짐이 보인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제친 5개 동에 창신2동이 들어간 것을 두고 ‘도시재생 대 재개발’의 팽팽한 구도가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나왔을 정도다. 41표 차이였다. 창신동에선 뉴타운과 도시재생의 교훈이 모두 나타난다.

■재개발이란 ‘쾌도난마’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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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한 점포 앞에 월세 매물 정보가 부착되어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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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재개발’도 해법 될 수 없어
재개발 사업성 담보되지 않고
주민생존권 문제도 해결 어려워

“2020년 10월 초 633-1, 또 10월 초 143-18, 12월 말 문구완구종합시장…. 2021년 3월 말 406-1, 4월 초 신발도매상가….” 지난 10일 만난 강대선 창신동 공공재개발추진위원장은 최근 창신동 일대 화재 발생지를 나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소방도로가 없는 이곳은 도시재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전면 재개발만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정화조 시설조차 없는 집이 많다”는 강 위원장의 말을 들으면, 재개발은 창신동에 대한 명쾌한 해법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건 지난날에서 알 수 있다. 창신·숭인 뉴타운사업은 추가 분담금이 늘고 개발 이익이 줄자 주민끼리 갈등을 빚다 엎어졌다. 이 지역은 한양도성에 인접해 건축높이가 제한되기 때문에 재개발 사업성이 애매한 곳으로 꼽힌다. 재개발 요구는 부동산 경기와 함께 꺼졌다가 경기가 오르자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 등락에 따라 반복되는 역사다. 문제는 상승세가 지속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주민 생존권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창신동은 가파른 경사와 허름한 집으로 ‘악명’이 높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저렴한 서민 주거지가 될 수 있었다. 통상 재개발 사업 후 재정착률은 20%를 넘기 힘들다. 공공재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은 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가 주어지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고 한다. 강 위원장은 “용적률 300%를 받으면 9000가구를 공급할 수 있다”며 “소유주 몫을 빼고 나머지 6000가구로 젠트리피케이션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뉴타운사업 계획에서도 공급량은 7855가구에 불과했다. 개발 전 7028가구에서 10%가량 늘었다. 주택 증대 효과를 110~120%로 잡는 보통 재개발사업의 계산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추진위가 잡은 공공재개발 사업지(창신1동 일부와 창신2동) 면적은 뉴타운 사업지(창신1·2·3동과 숭인1동)의 절반 정도다. 지역이 지닌 태생적 한계 때문에 공공재개발의 전망 역시 불투명한 셈이다.

■‘느려도 너무 느린’ 재생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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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거리의 한 건물에 그려진 벽화 앞에 쓰레기가 놓여져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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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공장 모인 동네 특성 살려
관광화 사업에 예산 투입했지만
주민들 원한 기반시설 정비 못해

지금의 창신동을 긍정만 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2014~2017년 정부·서울시 예산을 투입해 도시재생 ‘마중물 사업’을 시행했다. 이후 주민들이 꾸린 창신·숭인도시재생협동조합(CRC)이 재생사업을 지속했다. 도시재생 당국자들은 “도시재생 성과를 보려면 최소 10년은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감안해도 2021년 창신동엔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났어야 한다.

도시재생 지역에서 주민이 바라는 개선 사항을 조사하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세 가지가 있다. 좁고 불편한 길, 부족한 주차장, 전선이 뒤엉킨 전신주다. 노후 저층 주거지가 공통적으로 안은 이 문제는 단순한 미관과 편리가 아니라 생존·안전과 밀접하다. 적어도 비상시에 소방·응급차량이 원활하게 다닐 길은 필요하다. 주민들은 기반시설 정비를 바란다.

창신동 사정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가 2013년 9월 뉴타운지구 해제 직전 실시한 주민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보도와 도로 확장·정비’(16.0%)와 ‘주차 공간 확보’(15.0%)를 많이 요구했다. 2014년 3월 도시재생선도지역 지정을 앞두고 시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원하는 도시재생 사업’으로 ‘산업환경(도로·주차장·상하수도 등) 개선사업’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하지만 실제 사업은 주민 의견과 다소 동떨어져 흘러간 측면이 있다. 기반시설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는 창신동의 복합적 성격을 봐야 한다.

창신동은 달동네이면서 소규모 봉제공장 1000여개가 골목 곳곳에 자리한 도심산업단지다. 창신동 봉제업은 동대문상권을 아우르는 의류산업의 한 부분이다. “옷 하나 만들면 퀵이 15번 온다”는 말은 한 동네에서 자재, 재단, 재봉, 마무리 작업을 모두 소화하도록 촘촘하게 얽힌 ‘봉제 생태계’를 나타낸다. 마중물 사업 예산 200억원 중 상당액이 봉제업에 쏠린 이유다. 어두운 골목 개선, 도서관 등 주민공동시설 건립, 어린이놀이터 조성 사업 이상으로 봉제역사관 건립 등 관광화 사업에 예산을 썼다.

손경주 창신숭인CRC 상임이사는 “창신동 봉제업을 알리고, 봉제인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했다. 청년 디자이너와 창신동 봉제공장이 협업하는 ‘창신데님연구소’가 창신동에 둥지를 트는 등 실제 봉제업엔 재생의 기미도 나타났다. 창신동 봉제업은 교육과 공동사업을 통해 새 세대를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봉제업 바깥에 있는 주민들이 70~80% 정도로 훨씬 많다. 여기엔 봉제업 재생과는 다른 주거지 재생의 논리가 필요했다.

■기반시설을 살리는 ‘재생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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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공영주차장 및 복합시설 건설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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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고정적 방법론 벗어야
지역 일부에 아파트단지 공급 등
정교하고 능동적인 정비가 필요

창신동은 1호 사업지로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헤쳐나가야 했던 측면이 있다. 구자훈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한정된 재원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던 시행착오라고 진단하며 “비판받을 만하다”고 인정한다. 구 교수는 국무총리실 도시재생특별위원회 위원,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구 교수는 “창신·숭인은 초기 도시재생 모델로, 온갖 악재를 다 거쳤던 곳”이라고 말했다. 창신동 재생 이후, 재생을 하기에 적절한 범위부터 새로 정의됐다. 창신·숭인 사업지는 83만㎡에 달한다. 반면 이후 도시재생 뉴딜은 창신동 같은 근린재생형 사업 대상지를 5만~20만㎡로 잡고 그 유형도 세분화했다. 주거와 산업이 뒤섞인 창신동과 달리, 그 성격도 단일하면서 예산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규모를 고민한 것이다.

재생의 방향성도 틀기 시작했다. 구 교수는 “보통 도시재생 무용론이 제기되는 곳은 기반시설이 열악한 노후 주거지”라면서 “기반시설을 정비한다는 개념 없이 재생사업을 시작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대적 기반시설을 갖춘 해외 기성 시가지 재생 모형을 그대로 이식하면서, 공동체 활성화에만 초점을 뒀다는 게 구 교수의 설명이다.

당국도 대안 마련에 집중하는 지점이다. 전면 재개발의 가능성은 낮지만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창신동 같은 노후 저층 주거지가 대상이다. 수도, 전기, 가스 등 주요 기반시설과 연관된 도로 개선과 주택 개량을 분리해 취급했지만,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정비사업이 도시재생에 결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다. 빈집, 빈터를 활용해 주민시설, 주차장을 ‘점’ 단위로 삽입하던 재생에서 ‘선(도로)’과 ‘면(주택단지)’ 단위 재생 개념으로의 확장이다. 소방도로 확보 등 최소한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이 방향성 위에 양천구 엄지마을 같은 사례가 나온다. 서울시는 543가구가 사는 이 마을에서 비정형 골목구조를 지닌 4분의 1 정도만 재건축 아파트 300가구를 공급하고, 나머지는 기존 재생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기반시설이 취약한 지역엔 능동적 정비행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같은 발상은 지난 2·4 공급대책에서 유형화된 ‘주거재생 특화형’에도 담겼다. 도시재생 뉴딜 사업지 안에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을 연계한다는 구상이다. 30곳 안팎을 지정해 선도사업을 실시한다는 게 정부 목표다.

결국 도시재생 지역 일부에 아파트단지를 공급하는 방안인데, 인구가 계속 집적되는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가능한 방법이다. 초점은 아파트 공급 그 자체보다는 지역의 기반시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교하게 지역 일부를 재개발하는 데 있다.

도시재생 방법론은 고정적이지 않다. ‘뉴타운 광풍’ 반작용으로 원주민 보호와 주거지 보존만으로 역할을 다했다고 보던 시절은 지났다. 2014~2017년 서울연구원장을 지낸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2월 출간한 책 <서울을 바꾸다>에서 “(도시재생사업이) 보다 다양한 방식이 도입되고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며 “노후 주거지에 대한 보다 공격적인 개선과 개발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 교수는 “자본 이득을 취하면서 재개발할 수 있는 곳과 자본주의 시장 공급 논리의 바깥에 처한 곳 중 어느 곳이 더 많을까. 당연히 바깥에 처한 곳들”이라며 “도시재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시재생법 제2조가 정의한 대로, 도시재생은 인구 감소와 산업구조 변화의 시대에 해법을 도모한다. 도시재생이 유연하게 진화하면, 일단 용적률을 키우고 보자거나 개발 자체가 안 된다는 논리 모두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 된다. 노후 저층 주거지를 위한 ‘재생 2.0’이 필요한 이유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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