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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기자수첩] 수출기업과 선사의 신뢰부족이 부른 선박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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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권오은 기자




지난해 11월, 수출기업들이 연말 특수를 앞두고 선박이 없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수출기업들의 호소가 쏟아지자 해양수산부와 국적선사 대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기 운임계약 또는 우대계약이라 불리는 ’SC(Service Contract)’였다. 1년 단위로 운임을 결정해 계약하는 방식이다. 당시 국적선사 임원은 “장기계약 비중을 늘리는게 선사와 화주 모두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국내 화주들의 외면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6개월이 지났다. 해운 시황은 ‘사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뜨거운 상반기를 보내고 있다. 상황이 바뀌면서 선사들의 입장도 달라졌다. “굳이 지금 장기계약을 늘릴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1회성 계약인 스팟(spot·비정기 단기 운송계약) 운임이 1주일마다 40피트 컨테이너 1개(FEU)당 1000달러씩 치솟고 있어, SC보다 스팟이 더 유리해졌기 때문이다.

대형 화주들도 관망세로 돌아섰다. SC를 맺어도 지난해보다 2~3배 높은 값을 치러야 하는 만큼 비중을 늘리길 망설이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전까지 컨테이너선 시장은 공급(선복량)이 수요(물동량)을 웃도는 구조였던 만큼, 관망하다가 운임이 떨어지면 협상하겠다는 전략이다.

국적선사와 우리 화주간 신뢰가 바닥인 영향도 크다. 선사들은 SC 비중을 당장 높이더라도 운임 하락 국면이 오면 화주들이 가격 경쟁력이 있는 외국적 선사로 갈아탈 것이라고 주장한다. 화주들은 장기계약을 맺고도 스팟 운임이 오르면 다른 핑계를 대고 선박 배정을 취소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결국 선사와 화주 모두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일단 운임 조정기를 거친 뒤에 다시 협상하겠다는 취지다.

우리 해운 시장과 자주 비교되는 것이 일본이다. 일본 수출기업들이 일본 선사를 이용해 옮기는 수송량, 즉 적취율은 2015년 이후 60%대를 웃돌고 있다. 컨테이너선만 떼어 봐도 우리나라보다 20%포인트가량 높다. 일본 선사나 화주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다. 2008년 이후 일본 재무성과 국토교통성 주도로 선사와 화주간 펀딩 조성이 활발해지면서 신뢰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우리 정부도 ‘자국선 우선제' ‘우석 적취제’ 등의 제도를 검토했지만, 컨테이너선 시장에 적용된 마땅한 해외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접었다. 대안으로 나온게 ‘우수 선화주기업 인증제’인데, 지난해 하반기에야 도입돼 인증기업은 HMM, SM상선, 주성씨앤에어, 남성해운, 현대글로비스, CJ대한통운 등 6곳이다. 갈길이 멀었지만 인증에 따라 제공하는 한국수출입은행 등의 우대금리, 포워더 법인세 감면 등 인센티브가 정작 화주들에겐 매력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 속도감있는 정책이 도입되지 않는한 ‘시간이 약’일 수 없다. 오히려 금같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셈이다. 운임 등락에 따라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어그러지는 장기계약 논의 등은 정부가 나서서 길을 내줘야 한다. 키(舵)를 쥐어야 하는 해수부가 장관 임명 때까지 손을 놓고 있을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권오은 기자(oheu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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