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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시대의 요구를 온몸으로 빚어낸 ‘민중의 춤꾼’, 이애주 이사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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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별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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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 2013년 12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살풀이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 ‘바람맞이 춤’으로 널리 알려져
한국 무용 전 세계에 빛내…승무 예능보유자로 후학 양성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춤꾼’ 이애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이 10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4세.

유족에 따르면 이 이사장은 이날 오후 5시20분쯤 세상을 떠났다. 유족 측은 지난해 10월 말 암 진단을 받은 고인이 그동안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고 전했다.

고인은 시대와 소통하며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춤꾼이었다. 우리 전통춤을 집대성한 한성준(1875~1941)과 그의 손녀이자 제자 한영숙(1920~1989)으로 이어지는 승무의 적통을 이었다. 1974년 첫 번째 개인 발표회인 <이애주 춤판>을 연 이래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한국 전통춤의 가치를 빛내왔다.

고인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용어인 ‘무용’보다 ‘춤’이란 표현을 사용한 춤꾼이었고, 공연에서 ‘판’ ‘마당’ 등의 용어를 처음 쓴 것도 그다. 고인은 “ ‘춤판’이라는 말은 우리 문화의 민족성, 당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이라며 “우리 몸짓을 바로잡고 싶어서 ‘춤판’이란 말을 썼다”(2013년 경향신문 인터뷰)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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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애주 이사장이 1987년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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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처음 춤을 배운 것은 조선시대 궁중의 무동이었던 김보남(1912~1964)에게서였다. 1950년대의 김보남은 서울 운니동에 자리한 국립국악원에 재직했고, 같은 동네에 살았던 다섯 살의 ‘어린 애주’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김보남 문하에 입문해 춤을 배웠다. 고인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김보남 선생은 궁중에서 무동으로 일하면서 월담을 해서 한성준 선생의 춤을 배웠다. 승무와 민요춤, 살풀이까지. 제 스승은 그렇게 김보남, 한영숙 두 분인데 모두 한성준 선생의 맥을 잇고 있다. 그것이 저한테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박종철,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살풀이춤으로 ‘민중 춤꾼’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고인이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서 춘 ‘바람맞이 춤’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지난 2월 타계한 백기완 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당시 고인이 영결식에서 춘 춤을 “그 시대 민중의 요구를 온몸으로 빚어낸 몸으로 쓴 예술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같은 해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전통춤회 예술감독, 한영숙춤보존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9년 경기도문화의전당(경기아트센터)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2003년 만해대상(예술부문), 2013년 옥조근정훈장 대통령상, 2017년 제7회 박헌봉 국악상, 2019년 제1회 대한민국 전통춤 4대명무 한영숙상 등을 수상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조문은 11일부터 가능하며 발인은 13일 오전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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