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직권 결정…"국제법상 신의칙 지켜야"
2월 법원 인사로 재판부 교체 후 정반대 추가 결정
"확정판결엔 영향 없어" 피해자 측 "본안대로 집행"
21일 민사15부 위안부 할머니 2차 배상 소송 선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처음으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사건과 관련해 같은 재판부가 “강제집행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정반대 결정을 내린 것으로 20일 확인됐다. 2017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일제 강점기 과거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잇달아 내렸던 사법부 흐름에 제동을 거는 취지의 결정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부장 민성철) 심리로 열리는 고(故) 곽예남 할머니 등 20명의 2차 손해배상소송 선고에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된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부장 김양호)는 지난달 29일 고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일본 정부에 제기한 손배소 승소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 국고에 의한 소송구조 추심결정’을 내렸다. “국가의 소송구조로 진행한 이번 소송에서 피고 일본 정부가 부담할 비용은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일본 측에도 공시송달로 이같은 결정을 통지했다.
재판부는 “본안 소송은 일본 정부의 국가면제('특정 국가는 다른 나라의 사법부 결정에 기속되지 않는다'는 국제법 원칙)를 인정하지 않고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며 “그러나 외국에 대한 강제집행은 해당 국가의 주권과 권위에 손상을 줄 우려가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사건 소송비용을 강제집행하게 되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법원 내에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결정”이란 반응이다.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되면서, 새 재판부가 전임 재판부가 내린 확정판결의 집행에 제동을 거는 모양새였다.
앞서 1월 8일 같은 재판부(부장 김정곤)는 “일본 제국의 반인도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예외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며 “일본 정부는 원고들에게 1억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일제 강점기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했지만, 주권적 행위에 대한 국가면제를 폭넓게 인정하는 국제법 판례는 물론 기존 대법원 판례나 헌법재판소 결정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결이어서 법원 안팎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한 2018년 10월 강제징용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외교적 후폭풍’을 부를 것이란 우려도 제기됐다.
재판부는 이 때 위자료 지급 명령과 함께 “소송 비용은 일본이 부담하라”는 주문도 함께 냈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소송·상소 절차에 일절 응하지 않아 1월 23일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후 2월 초 서울중앙지법의 법관 정기인사로 민사34부는 구성원 전원이 교체됐다. 재판장을 맡았던 김정곤 부장판사는 서울남부지법으로 발령났고, 김양호 부장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부가 새로 구성됐다. 새 재판부는 한 달만에 직권으로 “강제집행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낸 셈이다.
일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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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소송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에 관한 법원의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민사판결의 통상 절차라고 한다.
그런데 결정 내용을 보면 재판부는 ‘외국 정부에 대한 강제집행의 위법성’을 상세히 열거했다. 본안 판결이 주요 근거로 삼은 국제 협약·판례도 강제집행을 해선 안 되는 근거로 인용하며 사실상 본안 판결을 반박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재판부는 “외국 정부의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은 현대 문명국가들 사이의 국가적 위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를 강행하면 우리 사법부의 신뢰를 저해하는 등 중대한 결과에 이를 수 있다”며 “이번 사건은 기록에 나타난 모든 자료를 보더라도 유엔(UN) 국가면제협약상의 외국 정부에 대한 강제집행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고, 이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재산을 강제집행하게 되면 헌법상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와 상충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도 우려했다.
재판부는 국제법상 '이전과 모순되는 행위를 할수 없다'는 금반언(禁反言·estoppel) 원칙을 들어 “일본 정부에게 이 사건 소송비용의 추심결정을 하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르면 어느 국가도 국제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법부의 판결 등 일체의 국내적 사정을 원용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극단적으로 조약이 국내적으로 위헌으로 무효가 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대한민국은 조약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면서다. “확정판결에 의한 권리도 신의칙에 따라 행사돼야 하고, 판결에 따른 집행이 권리 남용이 되는 경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거론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선 “최근에도 양국 정부는 위안부 합의의 유효성을 확인했고, 상당수 피해자들이 기금(화해ㆍ치유재단)에서 금원을 받아갔거나 잔액이 일본에 반환되지 않았다”는 점이 강조됐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판결 직후인 1월 18일 신년기자회견에서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이라며 “한국 정부는 그(위안부) 합의가 양국 간 공식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재판부가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거의 모든 평화조약과 전후처리 관행에서 국가 사이에 총액 정산을 하는 경우 희생자 개개인에 대한 배상은 필수 규범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ICJ는 전시에 다른 국가 영토에서 무장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에 관해 국가면제를 인정했다”고 인용한 부분도 전임 재판부와 반대되는 관점을 밝힌 것이다.
앞서 본안 판결은 같은 ICJ 판례에 대해 “한반도는 무력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ICJ 사례를 적용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문은 당사자의 신청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낸 것이라고 한다. 재판부는 이번 결정의 의미에 대해 “사건 확정 후 기록을 보존하는 절차에 앞서 내린 결정”이라고만 설명했다. 법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 “이례적인 결정은 맞지만, 확정 판결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결정문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위자료 지급 강제집행 사건에 참고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은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측은 이번 결정과는 관계없이 일본 정부가 위자료 지급을 하지 않을 경우 강제집행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이다. 피해자 소송 대리인인 김강원 변호사가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에 재산 명시 신청을 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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