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얀마 양곤에서 반군부 대학연합 소속 학생들이 시위 시작 전 대열을 가다듬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지 대학생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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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 쿠데타 직후엔 군인들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라 생각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이 살인을 좋아하고 고문을 즐기는 부류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이달 초 현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접촉한 반(反)군부 대학연합 소속 미얀마인 A(23)씨는 단호했다. 지난달 27일 양곤 사우스 다곤 마을 입구 도로에 불에 타다 만 시신들을 수없이 발견한 이후, A씨와 친구들은 군인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같은 날 만달레이에서 발생한 시위대 시신 전소 사건은 외신을 통해 알려졌지만 더 참혹했던 사우스 다곤의 참상은 계엄령으로 인해 전할 길이 없었다"며 "시신을 태우며 즐거워하던 군인들은 그저 살인마였을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A씨 대학 동기인 B씨 몸에선 화약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2월 3일 양곤 집회 참여를 계기로 현장 '방어조'를 자청했으니 벌써 50일 넘게 군경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 살고 있어서다. B씨의 손에는 투쟁의 시간만큼 철이 겹겹이 덧대진 방패가, 발 언저리엔 화염병과 새총이 매일 놓여있다. 그는 "대나무 더미와 쓰레기통, 모래주머니로 쌓은 1차 장벽과 2차 방패 방어선을 만들고 군병력이 접근전을 시도하면 사제 연막탄을 터트리는 게 역할"이라며 "내가 오래 버틸수록 도주하는 친구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높아진다"고 담담히 말했다.
지난달 미얀마 양곤에서 반군부 시위 도중 총격을 당한 시민을 동료들이 황급히 이송하고 있다. SNS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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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후방 지원 역할을 맡고 있는 여대생 C(22)씨는 유엔 등 국제사회를 향해 날을 세웠다. 그는 "유엔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지만 세계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살상용이 아닌 방어용 무기를 확보해 우리만의 싸움을 최대한 길게 이어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에 대해선 고마움과 당부를 동시에 전했다. C씨는 "한국 시민단체와 종교계가 미얀마 시민을 응원하고 기도하는 것에 정말 너무도 감사한다"면서도 "한국 기업들이 군부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미얀마의 민주화가 올 그날까지만 보류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14일 현재 세 명의 대학생들은 다행히 살아있다. 모두 쿠데타 초기부터 한국일보에 현지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 취재원들이다. 이틀 전 양곤에서 B씨처럼 시민들을 지키던 초 르윈 트웨가 체포된 뒤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들의 안전이 걱정됐다. 이날 세 사람과 모두 연락이 닿은 뒤에야 안도했다. 세 사람은 여전히 저항의 최전방에서 투쟁하고 있다.
내일에 대한 보장은 없다. 전날 기준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에 따르면 군부가 체포한 시위대는 최소 3,054명, 사망자는 714명에 달한다. 악명 높은 인세인 교도소에서 군의 고문을 받다 숨진 양곤 시위대 동료들의 시신은 최근 강과 야산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당장 내일 이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는 나날인 셈이다.
그럼에도, A씨는 인터뷰 내내 "봄꽃을 꺾을 순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B씨와 C씨의 맹세는 비장하다. "개인이 아닌 군부라는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관건은 인내심이다, 과거처럼 군을 두려워하며 숨지 않겠다." 미얀마는 미얀마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얀마 최대 명절 '띤잔' 이틀 째인 14일 만달레이에서 한 학생이 군부 타도 구호를 목청껏 외치고 있다. 만달레이=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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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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