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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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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봄날에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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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4월 초인데 벌써 봄꽃들이 다 피었다. 마스크를 써서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게 유감이나, 눈이라도 실컷 호강해야지. 눈이 부시게 하얀 목련, 벌써 지려고 가장자리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꽃잎을 보며 내 가슴이 타들어간다. 봄날은 짧다. 아름다운 것들은 다 순간이다. 아쉬웠던 내 인생의 봄날을 목련 그늘에 묻고 눈을 들어 현재를 온전히 즐기려는데, 금방 시들어버릴 꽃잎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품어 감상하려는데 방해꾼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파트 승강기를 교체하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내가 사는 단지 안에 ‘경축: OO단지 승강기 교체’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주민이 내는 관리비를 저런 쓸데없는 데 낭비하다니. 이것도 적폐 아닌가. 벚꽃 목련 동백 개나리... 화사하게 피어난 봄의 정취를 가로막은 현수막이 보기 싫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결심한다. 가을에 이사 가야지. 이런 유치찬란한 현수막을 보지 않아도 되는 서울의 모처로 이사 가야지. 승강기를 교체하느라 어제부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덕분에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코로나 뱃살이 좀 빠졌을 거다. 아파트 승강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멀어졌지만 한때 나와 가까웠던 조카아이. 언젠가 내가 잡지에 발표한 수필 ‘저 달 좀 보세요’에서 갓난아기였던 그는 이제 나보다 키가 훌쩍 큰 청년으로 자랐고,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동생네 아파트를 두드렸던 젊은 이모는 지금 5층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어 숨이 가뿐 중년을 넘어, 노년이 됐다.

우리 이모는 왜 그리 이사를 자주 했을까? 어릴 때를 되돌아보며 이맛살을 찌푸릴 조카가 보인다. ‘이모도 이사를 좋아하지는 않아, 그러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고 적으며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어른이 된 조카는 나처럼 변명을 하지 않고 살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어느 날, 그 애가 네 살쯤 되었을 때다. 일산에서 내가 전세로 살았던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승강기에 타자마자 “내가 할게” 손을 치켜들며 옛날처럼 5층을 (당시 나의 새집은 9층이었다) 누르는 조카를 보며 나는 결심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어서 집을 사야겠다.’ 먼 훗날 이모의 그 하고많은 집들을 기억하느라 그 애의 골머리가 터지는 걸 원치 않아, 조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에 내 집에 정착하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나의 소원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해외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대출받아 내 집부터 장만하겠지만.... 그때는 결국 내 빚이라 생각해 주택담보 대출 신청을 꺼려 했다.

꼭 돈 문제만이 아니다. 나는 한 군데 오래 못 있는 사람이었다. 한 곳에 정이 붙을 만하면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역마살이 끼었다고 친구들이 말했다. 그렇게 받기 싫어하던 대출을 받아 장만한 작은 아파트에서 이 글을 쓰며, 코앞인 서울시장선거를 생각하며 한숨이 나온다. 누가 시장이 되든지, 내가 사랑하는 서울이 공사판이 되겠지. 한동안 시멘트 가루가 날리고 땅을 파헤치는 소음이 고막을 찢겠지.

서울이든, 지방이든 고층 아파트 단지가 새로 들어서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승강기가 없어도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5층 이하의 아담하고 예쁜 집을 지으면 안 되나? 너무 높아 끝이 보이지도 않는 고층빌딩이 어디가 좋은지....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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